“현대사회는 개인의 각종 정보가 타인의 수중에서 무한대로 집적, 이용 또는 공개될 수 있으므로 연결자 기능을 하는 주민등록번호가 불법 유출 또는 오·남용되는 경우 개인의 사생활뿐만 아니라 생명·신체·재산까지 침해될 소지가 크고, 실제 유출된 주민등록번호가 범죄에 악용되는 등 해악이 현실화되고 있다…(중략)…주민등록번호 변경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주민등록번호 불법 유출 등을 원인으로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하고자 하는 청구인들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다”_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가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불가능하게 규정하고 있는 <주민등록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위와 같이 판단했다. 사실상 주민등록번호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19대 국회에서의 논의는 이런 판단과는 결이 다르다. 주민등록번호 변경 청구를 가능하도록 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으나 불충분한 내용이라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 유출로 생명·신체상의 위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재산상 중대한 피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 성폭력·성매매와 가정폭력 관련 피해자 등에 대해서만 주민번호 변경을 가능토록 했으나 무작위 임의번호를 도입하는 문제는 뒤로 미룬 것이다.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주민등록번호 변경이 가능해지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도 아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된 사람들조차 현행법상 변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법 개정은 그렇게 단순하게 그렇게 볼 문제만은 아니다.

<주민등록법> 개정 운동을 해왔던 진보네트워크를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19대 국회에서 법안 처리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12일 <임의번호 도입없는 주민등록법 19대 처리에 반대한다>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헌법재판소가 부여한 제도개정 시한은 2017년 12월 31일까지”라며 “19대 국회 내에 시급히 처리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19대 국회에서 일단 주민등록법을 처리하면 20대 국회에서 다시 재개정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로서 임의번호 제도 도입은 영영 물 건너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렇다. 현실적으로 한번 법이 개정되고 나면 곧바로 개정 논의에 착수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법개정’을 촉구하던 인권단체들이 ‘법개정’을 반대하고 나선 까닭이다.

지금 중요한 건 당장의 법 개정이 아니다. 잦은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인해 주민등록번호의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드러난 바 있다. 생년월일과 성별, 지역번호 등으로 구성되는 13자리의 주민등록번호는 헌법재판소의 설명처럼 ‘연결자’(key data)로 기능해왔고 금융을 비롯한 민간의 영역에서도 널리 사용되다보니 일이 커졌다. 수치로만 본다면 온 국민의 주민등록번호는 이미 유출돼, 공개된 정보나 다름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개인정보도 유출된 것으로 이미 드러났다.

현행 <주민등록법>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주민등록번호 그 자체가 한국사회에 ‘차별’을 조장한다는 지적 또한 유념해야 한다. ‘성별’ 번호가 포함돼 있다는 점이 그 대표적 사례다.

1900년대에 태어난 사람의 주민등록번호 뒷 번호는 숫자 ‘1’이 아니면 ‘2’로 시작한다. 1은 남성 그리고 2는 여성을 뜻한다.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의 주민번호 뒷자리 첫 숫자는 남성은 ‘3’, 여성은 ‘4’다. 그런데, 이 같은 조합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두 가지의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왜 남성은 1번(3번)이어야 하고 여성은 2번(4번)이어야 하는가’, ‘트랜스젠더와 제3의 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몇 번을 부여해야하는가’라는 게 그것이다. 성별번호가 포함되는 것 자체가 성적 고정관념을 조장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를 볼 필요가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따라 13자리 국가식별번호 체계 중 12번째 자리에 숫자 ‘0’을 백인에게 부여했다. 그리고 ‘1’은 케이프컬러드, ‘2’는 말레이인, ‘3’은 그리콰인, ‘4’는 중국인, ‘5’는 인도인, ‘6’은 기타 아시아인, ‘7’은 기타 유색인 등으로 분류했다. 백인우월주의가 국가식별번호 체계에 그대로 포함돼 있던 것이다. 이 같은 번호부여 체계는 ‘인종차별’을 고착화시켰다는 점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1987년에 이 체계를 폐지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었던 건 아니다. 과거 초등학교 학급에서는 남성에게 앞 번호를 부여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문제가 지적되자 국가인권위원회는 ‘성차별’이라는 점을 들어 이런 관행을 시정할 것을 권고조치했다.

문제는 앞서 설명했듯 ‘차별’이다. 제3의 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현행 주민등록번호 체계는 ‘1’과 ‘2’라는 숫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물론, 성별을 바꾸는 수술을 한 경우 번호를 바꿔주기도 한다. 하리수 씨의 예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트렌스젠더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5년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실제 트랜스젠더 응답자 90명 중 60명(66.7%)이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해야하는 용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부담감을 느낀다”고 답변한 바 있다. 선거와 투표 참여를 포기한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 또한 22명(36.7%)나 됐다. 주민등록번호가 성소수자들의 기본권마저 제한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권단체들은 이에 “주민등록번호 성별 표시는 차별”이라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시정을 요청한 상황이다.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40여년 만에 고칠 기회가 되고있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는 이를 망각하고 충분히 논의할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대 국회에서 처리하려 하고 있다. ‘성별’만의 문제도 아니다. 국회 행안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한 개정안 자체에도 문제는 있다. ‘생명·신체상의 위해’, ‘재산상 중대한 피해’, ‘성폭력·성매매 등 피해자’에 대한 자의적 판단이 이뤄질 소지가 크다. 법원은 여전히 데이트폭력 등을 좁은 범위에서 규정하고 있다. 얼마 전 여자친구 A집에 화장실 창문을 통해 몰래 침입해 폭력을 휘두르고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B씨에 대해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가 어떤 기준으로 주민번호 변경을 허용해줄 것인지 미심쩍다. 정부가 ‘과도기’ 국회에서 <주민등록법> 개정안 처리를 몰아붙이는 의도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성별 번호 차별 여부에 대한 결정도 내리지 않은 시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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