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보다 귀한 목숨?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장 26절, 개역개정)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말하기 위해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이 말을 곧잘 인용한다. 특히 개신교는 이 구절의 의미를 ‘천하보다 귀한 목숨’이라는 경구로 간단히 표현한다. 이 간단한 문장은 인간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가치 있는 것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러한 가르침은 원론적으로는 매우 옳은 것 같지만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2012년을 기준으로 한해 1만 5천명의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나라,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 40,50대 사망원인의 2위가 자살인 나라,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하는 나라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인구의 비율이 폐암, 간암, 위암의 경우를 앞질렀으며,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도 자살로 죽는 사람이 더 많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수가 38, 625명,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경우는 14,719명인데 반해 한국에서 자살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그 2배에서 5배에 이르는 71,916명이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이러한 자살률의 수치가 매년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망원인으로서 자살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이전에는 10위권 밖이었지만, 1997년 8순위로 상승한 뒤, 2006년에는 5순위, 2009년에는 4순위까지 점하게 된다. 2012년을 기준으로 하면 10년 전인 2000년보다 자살인구가 109.4%나 증가하였다. 이러한 통계수치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199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한국 사람들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유익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나약해지거나 무기력해져버려 손쉽게 자살과 같은 유혹에 굴복하기 때문일까?

자료: OECD.STAT, Health Status Data(2015. 9. 추출), Statistics and Indicators for 34 Countries * OECD 기준인구로 연령구조 차이 제거한 표준화 사망률로 통계청 자살률과 차이가 있음 <출처-보건복지부 보도자료>

자살에 대해 말하는 방식들

기독교의 시조인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한 사람의 목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있지만 사실 자살이 죄라는 명시적 주장은 없다. 하지만 기독교는 자살을 명백하게 죄악으로 규정해온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로마 제국 말기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이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를 어기는 것이라 가르쳤고 중세 최고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이 신과 인간 공동체, 그리고 자연에 대한 범죄라고 보았다. 자살을 “악마의 작품”이라는 마르틴 루터의 말이 보여주듯이 자살이 죄악이라고 보는 기독교의 전통은 종교 개혁기에도 이어졌다. 자살에 관해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그것이 신의 뜻에 반하는 죄악이라는 입장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은 기독교 전통에서 신의 뜻을 어기는 죄악으로 표상되었고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중세 이전 서양에서는 자살을 자유인의 명예로운 선택으로 여기는 경향도 존재해왔다. 게르트 미슐러의 『자살의 문화사』에 따르면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은 자살을 신성한 의무의 일종으로 여겼다고 한다.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방법이 죽음 말고는 다른 것이 없을 때 이 세계를 떠날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오직 철학자에게만 속하는 지고의 존엄이다"는 세네카의 문장은 이런 태도를 잘 보여준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질병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거나 신체의 노화와 정신적 퇴화로 인해 자신의 존엄성을 잃을 수 있을 경우 스스로의 목숨을 끊음으로서 자기의 명예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태도와 결은 다르지만 자살을 개인의 권리로 보는 관점은 계몽주의와 더불어 등장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의 입장에서 자살이 일종의 계약불이행과 같은 것이라 개인의 권리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계약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 경우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볼테르 역시 자살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대책으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제시했지만, 그러한 노력으로도 자살을 막을 수 없다면 자살충동은 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흄의 경우는 이들 보다 적극적으로 자살을 권리의 차원에서 파악했다. 그는 자살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교회를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비판하며 각 개인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을 권리를 옹호했다.

계몽주의자들의 논리는 이후 자살을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의 차원, 즉 각자의 죽고 사는 문제는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 기초를 제공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논쟁거리는 안락사, 혹은 존엄사의 문제이다. 안락사(euthanasia)의 어원이 ‘좋은’을 뜻하는 접두어 'eu'와 ‘죽음’을 의미하는 ‘thanatos'에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이 말에는 필요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적 맥락에서는 치료 불가능한 병으로 인하여 고통 속에서 연명하기 보다는 고통 없고 존엄을 지킨 채 죽을 수 있는 것을 권리로 보장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근대사회에 진입하게 되면 자살을 바라보는 관점은 단지 철학적 논리나 신학적 규범과 같은 정신적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자살을 사회적 조건이라는 객관적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독교는 자살을 엄격히 금하는 전통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어왔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는 가톨릭교도보다 개신교도의 자살률이 매우 높았다. 두 종파는 모두 자살이 죄악이라고 가르치는데 왜 자살률은 두 종파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은 단지 자살이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이나 가치관 때문에 발생하는 것만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조건과도 연관되어있음을 시사한다고 당대의 사회학자 뒤르켐은 생각했다.

그의 저작, 『자살론』에 의하면 자살률은 사회에 대한 통합성의 정도와 관련된다. 개신교가 신과 개인의 직접적, 개별적 관계를 강조하는 반면, 가톨릭은 교회라는 공동체와 전통의 매개를 통한 신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에 대한 통합 정도가 낮은 개신교에서 그 정도가 높은 가톨릭보다 더 많은 자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혼자보다는 미혼자가, 대가족 구성원보다는 핵가족 구성원이 더 많이 자살하는 경향도 이런 통합의 정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뒤르켐은 말한다. 뒤르켐의 결론은 “자살은 개인이 참여하는 사회적 집단의 (도덕적) 통합 강도에 반비례한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아노미적 자살의 핵심이다. 개인이 공동체의 도덕적 규제로부터 벗어난 상태가 바로 ‘아노미’이며, 이 아노미 상태가 심해질수록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살을 이해함으로써 자살은 신의 뜻을 어기는 죄악이라는 표상으로부터 사회적 통합의 정도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 사회문제로 표상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살에 대한 이해방식에서 뒤르켐이 기여한 가장 큰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자살의 문제를 심약한 개인의 결정이나 죄악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인구 과밀, 경제적 상황, 가족의 해체 등과 같은 사회구조적 차원의 문제와 같이 객관적 조건과 결부된 것으로 이해하는 다양한 입론들이 출현하게 된다.

자살 양상의 변동과 그 의미의 변화

지금까지 자살에 대한 이해방식들, 즉 자살에 대해 말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러한 말의 방식은 단선적으로 진화되어온 것은 아니다. 자살의 문제를 도덕적 규범의 차원에서 판단하는 방식, 개인의 사적 권리로 이해하는 입장, 그리고 개인이 처한 사회적 조건을 통해서 접근하는 관점 등은 현재도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자살을 단지 개인의 도덕적 선택 문제나 내면의 동기만으로 설명하는 관점보다는 자살의 공통된 이유를 그것의 객관적 조건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관점, 대표적으로는 사회과학의 이해방식이 보다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자살에 대한 보다 합리적 이해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자살에 대한 객관주의적 이해방식은 기본적으로 양적 측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사회학이 잘 보여주듯이 이 입장은 자살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자살률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그것의 원인을 빈곤율, 실업률, 소득 추이의 변화 등과 같은 양적 변수들을 통해서 파악한다. 물론 그와 같은 이해방식은 자살이 증감하는 객관적 원인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객관주의는 특정한 시대에 유의미하게 부각되는 자살의 특징적 양상들과 그 양상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이유에서 얼마나 많이 자살을 하는가하는 양적 문제만이 아니라 어떻게 자살을 하며 그 자살의 방식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형성하는가라는 질적 문제 역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90년대 말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평범한 생활인들의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 이전에 자살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절규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나 독재타도, 민주화, 통일, 노동해방 등을 외치며 스스로의 목숨을 끊은 민주화운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의 자살이었다. 혹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집약되는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의 자살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위와 같은 경우의 자살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행위가 또한 가장 분명하고 처절한 의사표현의 방식임을 보여준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한 바처럼 인간, 아니 생명체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는 자기 보존의 욕구이다.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생명체의 본질적 충동이다. 그러나 과거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입시지옥에 시달리던 학생의 자살은 그러한 자기 보존의 근본적 욕구보다 강한 의사표현의 의지가 때로는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민주주의와 통일, 평등과 자유와 같이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외침이건,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한 입시지옥의 고통에 대한 규탄이건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끊어서라도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살이 자신의 절절한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극단적 경우가 되었던 것은 반드시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거의 모든 자살에는 의사표현의 성격이 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이들의 자살에도, 기사화가 되지 않고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는 자살에도 목숨을 끊은 이들이 전하려는 말이 담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서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향한 마지막 이야기 - 유서분석을 통해 살펴본 ‘소통적 자살’의 개념과 의의」라는 박형민의 글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이 글에서 자살이 단지 세상과의 단절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과정에 대한 성찰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타자에게 전하려는 소통의 의지를 담은 사회적 표현 행위임을 유서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모든 자살이 이러한 ‘소통적 자살’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또한 모든 자살이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무화로 돌리고 사회로부터 퇴장하는 무의미의 순간이라 할 수 없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런데 자살률의 급증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요즘, 그래서 자살에 대한 말들이 많아진 요즘, 자살로서 말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삶이 너무나 참담하고 사회에 절망한 이들은 그저 조용히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요즈음은 어떤 신호도, 의미도 없이 죽어간다. 잠자는 사회를 깨우면 안 될 것처럼 남몰래 세상을 뜬다. 그런 죽음에는 어떤 긴장감도 없다. 성공한 자와 이긴 자들이 구축한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지도 않는다.”(“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경향신문>2011년 2월 16일자) 유서도 없이, 어떤 호소도 없이, 그저 조용히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말없이 목숨을 끊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일까? 왜 그들은 그 어떤 소통의 의지도 없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일까? 왜 2010년 8월 1일 동작대교에서 투신한 18세 소녀는 “고시원비도 밀리고 너무 힘들다”는 문자메시지만 남겨 놓고 자살을 했을까? 왜 2011년 2월 8일 강릉의 한 원룸에서 연탄불을 피워 자살한 대학생의 방에는 그저 “즉석복권 여러 장과 학자금 대출 서류”(이대근, 앞의 글)만이 놓여 있었을까? 자살이라는 가장 극단적 방식을 통해 자기 보존 욕구라는 가장 근본적 충동을 거스르는 선택 아닌 선택을 했으면서도 왜 단 한마디도 자신의 울분과 고통, 분노와 좌절을 표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

침묵의 자살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침묵의 자살이 보여주는 바는 자살이 의사표현의 방식으로, 그것도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가르침에 사람들이 적지 아니 동의하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음으로 무엇을 말하고, 호소하더라도 자신의 말이 들리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알게 돼버린 것이 아닐까?

오늘날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 보다, 폐암이나 간암으로 죽는 이들 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자살이 비정상적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마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이 그러한 것처럼, 자살로 인한 죽음이 응당 우리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죽음의 방식임을 인정한다. 1시간에 두 명이 자살로 죽어가는 사회에서 자살은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단지 자살로 인한 죽음만이 우리 사회에서 ‘흔한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용산 남일당에서 강제철거에 저항하던 시민 5명과 진압경찰 1명이 죽음을 당했어도 아직도 진상규명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사회,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자본의 노조파괴에 저항하며 고공농성을 하다 자살을 해도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회, 진도 앞 바다에 침몰한 세월호에서 304명의 목숨이 수장 당했어도 그저 교통사고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있고, 세월호 유가족의 요구를 이기주의라고 매도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농성 중인 천막 앞에서 버젓이 폭식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용납되는 사회가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사회이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이 너무나 ‘흔한 일’이 되어버린 사회. 사람 목숨 값이 너무나도 무가치해져버린 사회. 약한 자들은 억울하게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이들은 아무런 말이 없이 그저 스스로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있다. 다만 그들은 자살 그 자체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대로라면 인간의 권리가 그 무엇보다 존중되는 사회는 이미 죽어 버린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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