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욕구 충만하던 시절이 있었죠. 그땐, 연애나 연인에 대한 예찬과 혹은 그러한 일련의 감정적 경향에 대해 언제나 찬미를 달고 살았죠. 예컨대 이런 것이었죠.

“모든 권력이 상상력이라면, 난 당신에게 있어 권력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요. 난 오직 그대 사랑하는 마음에 밤하늘을 날아서, 이룰 수 없는 저 꿈의 나라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이 말이요.”

우린 7년을 만났죠. 왜 그녀가 내게,를 생각해보면 참 아슬아슬한 시간이죠. 이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렀습니다. 음, 그러니까 제 말은 이야기에 안 반하는 사람은 없었더라는 겁니다. 말 많이 하고 유머러스하면서 적당한 치고 빠짐의 리듬감이 습관화되어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자유 연애질에 성공하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그런 사람 한 둘이 적당히 섞여있는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더라, 뭐 이런 결론 말입니다. 당연히 언제나 영양가나 실속은 보장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면 각설하고, 시작합니다.

[본론]
1891년 쯤 그러니까, 카네기홀의 증축과 함께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란 슬로건 아래 비록 지금은 29만원 밖에 안 남으셔서 무료 골프를 즐길 수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끝발 중에서도 그런 끝발 없었다는 왕끝발을 날리셨던 前두환 장군께서 가오 이만큼 잡고 야구공을 던지셨던 그 해에, 그때에 어떤 (사내)가 태어났습니다.(그녀는 그로부터 2년 전에 태어났고요.)

굳이 (사내)라 부르지 않는 것이 타당하고 공정하고 바른 언어습관이겠지만, 마땅히 그 아이는 (사내)였고, 또한 그 (사내) 태어남으로 할아버지에서 큰아버지까지, 아버지의 아버지에서 그 아버지의 큰아들까지 뭐 그런 전통적 계보에서 (사내) 출산한 엄마가 real family로 인정받았다고 전해지니, 이 참으로 (사내)다운 일 아니었겠습니까?
누가 밀어 땡긴것도 아닌데 시간은 흐르고, 수염이 거뭇해지고. 그렇게 시간이 스무해 남짓이 넘어서 그러니까 사내가 잡스런 연애에 연달아 실패한 어느 날, 사내는 그 종결적 감정을 부여잡고 연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겁니다. 사랑이 무어더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일 뿐이다”라는 식물학적이고 수동적인 합의를 넘어서는 뭔가가, 그러한 뭔가가 사랑이라는 이름에, 이 감정의 절정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냔 말이다.

[보론]
예를 들어, 이런 가정을 해봅니다. 어느 남녀가 있었는데, 남자는 사랑, 우정, 의리 이런 눈에 보이지 않고 필수불가결적으로 코 맹맹해야 될 것 같은 것들을 비웃으며 두 주먹 불끈 쥐며 사랑과 의리를 외치는 ’김보성‘ 식의 감정남발을 ’천박해, 천박해‘ 이렇게 비웃으며 이런 천박함이 판을 치는 세상을 비꼬는 일 외에는 살 수가 없다, 이러했다고 칩시다.

반면에 여자는 ’사랑이 변하니‘와 같은 어느 주옥 같은 영화 대사를 귀한 주술처럼 외우는, 그래서 남자의 마음을 들었다 메쳤다, 마치 풀로 붙여놓은 심장마냥 콩닥콩닥 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더라면.

그런데 어느 날, 이 두 사람이 갑자기, 남자가 신봉해 마지않던 3류 영화처럼 스치듯 아슬아아슬하게 아찔한 ‘엄정화’식 타이밍의 짧은 순간에 반하고, 70년대 하이틴 영화에서나 등장해야 마땅할 교류의 시간을 거쳐서, 하루 한 20시간 쯤 같이 있으면서도 ’그리워, 보고싶어‘를 연발하게 되는, 그런 미친 속도에 갇히게 된다면, 다면. 과연, 연애는 무엇이고 사랑은 다 무엇이며, 이 둘의 기구한 운명은 당최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요?

문득, 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보.이.지.않.는.어.떤.감.정.들.에.대.해.서.‘

[결론, 결혼]
연애, 사랑 그리고 결혼. 답이 있는 것처럼 장황하게 말했지만, 예상하시는 대로 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청혼’이란 것을 했고 그 증거로 매일 들썩거리는 마음과 피곤함과 지침을 멀리하게 되는 ‘마징가Z’화 되는 몸의 과정을 증거라면 증거, 과정이라면 과정으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2월 14일은 크리스마스처럼 감히 모든 시작하는 연인들이 모텔에 성지 순례를 하고파 하는 날입니다. 거기에도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이라고 하는 보편타당한 인류애의 실천을 앞둔 내가 생각하는 연애와 사랑은 ‘든든하게 그냥 그 자리에서 조금 더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혼은? ‘해방을 향하는 오직 한 길로 달리는 행위’입니다.

온종일 어떻게 sex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잠도 자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sex를 하기 위해서는 돈도 벌어야 하는데. 다만, 함께 비디오를 보는 것은 가능하겠죠. 무언가를 같이 훔쳐보는 것도 좋겠죠. 모니카 벨루치, 빅뱅, 그것도 아니라면 시시한 만화책이라도. TV가 왕왕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탈주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면돗날 같은 헤어짐의 감정은 이제 꺼버려도 될 것이고. 규격화된 전파의 말들보다는 이종으로 가득 찰 악다구니의 말들이 남겠지요. 지긋지긋한 플래스틱 디자인의 옷장은 이제 필요 없을 것이고, 그 옷장의 옷들도 누군가를 향한 메시지라기보다는 그저 옷이면 되겠지요. 특히 한 여름밤에 수박과 함께 대하소설을 읽으면 근사하겠네요.

“당신과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서요. 정말, 그 뿐이에요.” 미안함과 서운함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마음들을 결국 미안함으로 정리하는 일. 1과 2사이의 셀 수 없는 거리에서 외로워하는 감정에게 명확한 자리를 찾아주는 일. 저, 결혼합니다.

* 이 글은 사적 감정을 공론화하여 처음 매체에 썼던 제 6년 전 제 글을 감정의 흐름과 시간의 변화에 맞추어 재구성한 제 생애 두번째 연애칼럼임을 밝힙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