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때론 사실이 협잡스러울 때가 있고, 때때론 협잡이 더 사실스러울 때도 있다. 이번 경우는 어떠한가?

▲ ‘용산 철거민 참사’ 관련 긴급현안질문을 위해 지난 11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한승수 국무총리가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기 전 물을 마시고 있다. ⓒ여의도통신
2.
지난 11일 용산참사와 관련한 긴급현안질의에서 민주당 김유정 의원이 한승수 국무총리에게 물었다. “설 연휴를 전후해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에서 경찰청 홍보담당관실에 ‘용산 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고 지시하는 문건을 보냈다는 의혹이 있는데, 이러한 의혹에 대해서 조사를 하시겠냐고?”

3.
한 총리가 대답했다. “글쎄, 저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무슨 메일이 갔는지 뭐가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알아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왜 문건에 대해 물은 질문에 메일을 알아보겠다고 답한 것일까.

4.
오늘(12일) 청와대는 문건 발송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다만, “사실 여부를 포함해 경위를 파악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곤 덧붙였다고 한다. “홍보하는 분이 홍보하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알려라’고 얘기한 거니까…”

5.
오늘 오마이뉴스의 후속보도에 따르면, 청와대는 내사중이라고 한다. 근데 뭘? 공식적으로 보낸 적이 없는 문건에 대해 뭘 내사한다는 것일까. 오마이뉴스는 <발신 :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 행정관 / 수신 : 경찰청 홍보담당관>으로 되어있는 이메일 공문을 입수/공개했다. 어제 한 총리는 문건을 물었는데 메일을 알아보겠다고 답했었다.

6.
군포 여대생 피살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한 다음날, 편집국 회의에서 이 사건이 뭔가 미심쩍다는 의견이 제출됐다. 그리고 마주치는 사람들 중 꽤 많은 이들이 ‘군포 여대생 사건’이 ‘용산’을 막기 위한 것 아니냐며, 통상적 뉴스 가치를 뛰어넘는 이례적인 보도가 나오고 있다는 말들을 했다. 정황적으론 그랬다. 웬만한 일간지 제목 정도는 매일 들춰보고 사는 나도 그 사건을 잘 몰랐었다. 애당초, 그 정도 강력사건은 별로 재구성될 범죄가 아닌 흔한(!) 사건이었다.

▲ ⓒ여의도통신

7.
군포 여대생 사건이 필요 이상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고 생각됐지만, 그러려니 했다. 스펙터클한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야 정보의 속도전이 수행하는 미디어의 확장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려니 했다. 난데없이 얼굴 공개 논란이 붙었을 때도, 그마저도 인권 사회의 재구성을 위해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라고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수사의 개가니 항공사진을 동원한다느니 하는 경찰발 보도 자료를 그대로 옮긴 기사들이 너무 잦고, 후져서 써볼까도 했었는데 뭔가를 ‘주장’하기에는 당시 상황이 너무 ‘정황’으로만 구성되는 ‘사실’이었다.

8.
예컨대, 있지도 않은 북침 위협에 맞서 ‘평화의 댐’을 짓는 시대는 아니라고, 여론을 환기/단속하기 위해 비행기를 떨어뜨리는 정권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렇다. 예민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시대를 너무 낙관했었다.

9.
이 정권 막장이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독재나 공안과 같은 학술적 개념, 정치적 언어를 쓰기에도 부끄럽다. 이건 그냥 모리배다. 너무 과하다고. 공문 내용이 말해준다. 용산사태를 반정부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자국민이 죽은 참사를 이렇게 표현하는 정권을 그럼, 뭐라 불러야 하는가? ‘홈페이지, 블로그 등 온라인을 홍보’를 통한 즉각적인 여론 (조작) 효과를 지시하는 정권은 또 어떤가? 부처 전체를 ‘협잡’에 동원하며 ▲연쇄살인 사건 담당 형사 인터뷰 ▲증거물 사진 등 추가정보 공개 ▲드라마 CSI와 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비교 ▲사건 해결에 동원된 경찰관, 전경 등의 연인원 ▲수사와 수색에 동원된 전의경의 수기 등의 구체적 전술 지침까지 전달하는 컨트롤 타워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는가?

10.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정말 모르겠다. mb 취임 불과 1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느냐 말이다. 어쩌면, 그 답까지 청와대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공문 맨 마지막에는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고 적혀 있다. 사실을 협잡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정부와 협잡을 사실로 만들어주는 언론. 여긴 그런 개수작이 공문으로 횡행하는 나라이다.

▲ 지난 1일 오전 경기서남부 연쇄살인사건 피의자 강아무개씨가 현장검증을 위해 2월 1일 현장에 나타났다.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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