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맞다. 지금이 민주노총을 팔 때이다. 그런데, 어떻게? 각설하고, 공급과 수요가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이야 누구나 아는 진리이다. 모름지기 공급이 많아질수록 당연히 수요는 까다로워지는 법이다. 민주노총 관련 기사는 차고 넘친다. 분석은 쌍방향으로 가능하다. 넘치는 ‘공급’에 대해서도, 까다로워야 할 ‘수요’에 관해서도.

넘치는 공급

결국, 민주노총 지도부가 버티지 못하고 총사퇴했다. 버티지 못할 일을 판단, 성찰하지 못하고 버티는 이들은 속된 말 한 마디로 정리하면, 무식이다. 그러나 무식은 그 자체로 죄가 되진 않는다. 민주노총의 무식이 죄가 된 것은 무식을 넘어서는 ‘뻔뻔함’과 ‘폭력’의 문제였다. 무식하면서 뻔뻔하기까지 하면 때때로 범죄가 된다. 민주노총의 문제는 어느 간부의 성폭행을 조직보위의 논리로 덮으려 했던 조직의 마초적 자세 문제였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가해진 압력은 상상하기 어려운 야만적 폭력 행사였다.

결국, 문제를 이 지경까지 키운 것은 민주노총 지도부 자신들이다. 지도부 누군가가 말했다. “지도부 총사퇴는 민주노총 최대의 위기가 아니다”고. 적극, 동의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의 있는 조합원들이 있으니, 현 지도부가 있건 없건 문제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 오히려 위기는 위기를 과장하며 얄팍하게 자리를 보존하려던 언술의 위기였다. 그리고 뼈아픈 건 그 과정에서 민주노총 지도부의 영혼이 조중동에 잠식당한 부분이 탄로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민주노총 집행부는 조중동에 영혼을 잠식당한 것일까? 고민해봐야 할 부분인데, 단서를 찾아보면 이렇다. 투쟁의 현장에서 부르는 노래 중에 <철의 노동자>란 노래가 있다. 여러 버전이 있지만, 안치환이 부른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 가사는 “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 사랑”이다. 오래된 노래인 이 <철의 노동자>의 가사를 이해하는 조중동식 문법에 대입해보면 영혼이 잠식당한 민주노총의 그림자가 보인다. 조중동은 그 노래를 통해 ‘철의 노동자=강성노조=민주노총=민주노조’를 연상한다. 민주가 제일 마지막에 배치되는 4단 문법인데, 그 중에서도 주로 사용되는 표현은 가운데 부분 즉, ‘민주노총=강성노조’이다.

조중동, 그 ‘내 것만 만능’적 뇌구조에게 민주노총은 노조의 강성함을 설명하는 보통명사였다. 조중동이 세상에 해설을 붙이는 간단한 원리 중에 하나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조 탓을 하는 것이다. 투자가 안 되는 것도 노조 때문, 교육이 난맥인 것도 노조 때문,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도 모두 노조 때문이다. 이유는? 그들이 강성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웬걸. 이런 넙죽 받아먹어야 할 떡이 있나. ‘강성노조=섹스노조’란다. 오호라, 쾌재여. 삼천리에 만복을 내리는 일이 이제야 납셨단다.

▲ 2월 9일자 조선일보 8면 기사.
민주노총 관련 언급 자체를 최대한 자제하는 것으로 민주노총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이 조중동의 오랜 전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일보의 경우, 민주노총은 취재 자체가 원천 불가한 사정도 있다. 조중동이 민주노총 기사를 취재하여 쓰는 경우는 딱 2가지 경우뿐이다. 그들이 원하는 사회 구성에서 민주노총이 완연히 일탈했거나 혹은 일탈과 연결지을 수 있을 때, 그리고 민주노총의 강성함(그들이 원하는 건 ‘좌빨’성)을 사회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을 때. 이번 경우는 좀 고약한데, 조중동이 민주노총 기사를 쓰는 2가지 경우 모두를 충족시키면서, 사회적 상식에서 마저 일탈하는 흔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기사가 많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위상이 이 정도였나를 새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조중동은 지금 사회적 저급함에 대한 개탄이란 것을 하고 있다. 배알이 꼴리지만, 진영 논리라고만 생각지는 않으련다. 알든 모르든, 더디더라도 조중동도 학습이란 것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흔치 않은 순간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배움은 때때로 홀로 유독 위대한 것이다. 사회적 의미가 있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대하는 조중동의 태도가 이렇게 급진적으로 대범해질 수도 있다.

지난 정권에서 있었던 한나라당의 성폭력/추행 사건에서 유독 ‘기계’적 중립의 태도를 고수하던 조중동이었다. 앞으로도 그러진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성폭력이 조직 문화 전체의 문제라는 성인지적 관점을 갖고 있는 조중동이니까. 사회 평균의 인지력, 기억력 수준보다 심각하게 퇴행적인 그들이어서 또 어떨진 모르겠고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어렵더라도 적어도 그들에게도 낯짝이란 것은 있으니까 믿어보자. 낭만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사회는 진전하는 것이다. 적들도 개화시키고 마는 보편타당한 상식의 힘으로.

까다로워진 수요

어떤 이는 시민단체가 침묵하는 것을 비판했다. 다른 미디어는 민주노총의 저열함과 침묵에 대해 추궁했다. 많은 이들은 민주노총의 가부장적, 전선지향적 정파주의에 환멸하고 있다. 그 모두가 옳다. 사회 진보를 실천하는 선의를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갑갑하다.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으면 또 다른 가해라도 하는 것인양 여겨지는 분위기에 논의를 보태고 싶다.

모든 성폭력의 문제를 언제나 조직/구조의 문제로 환원하면 간단하긴 하다. 특히나, 운동 조직의 경우 흔히 특별히 더 순결한 도덕성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강조되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과연 그래야 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내를 구타한 남편이 있다고 할 때, 남편의 어머니가 사과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감정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도의적 책임이란 종국에는 남편마저 구조의 부속으로 빼버리고 개인성을 완전히 탈각하는 가부장의 도의는 아닌가 말이다. 이번 성폭행 사건은 민주노총 조직 내 회계 부정과 같은 민주노총 시스템의 부실이 아니다. 민주노총의 성폭행 사건을 판단하며, 자행되고 있는 오류에 이런 비약이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이석행 사퇴라고 하는 비본절적 쟁점이 사퇴 전체의 도덕적 진위를 파악하는 쟁점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 2월 10일자 경향신문 8면 기사.
물론, 집행부 전체가 심각하게 정파적일 수 있다. 민주노총이 정파적으로 곪은 것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연 그렇다면, 정치적 노선을 천명하는 개개인 가운데 정파적이지 않은 누군가가 있나? 간단히 말하자면, 정파를 공격하는 사람도 방어하는 사람도 정파 자체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단 말이다. 그 각자의 정치적 실존의 마지노선이 성폭력이란 구체적 상황 하나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해석을 하나의 사실에만 접속하며 은폐 혹은 성찰의 이분법적 행위로 단죄하는 것은 곤란해 보인다. 적어도 관찰자적 입장이라면 그건, 민주노총 현 집행부의 젠더성이 낙후된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그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조직 보위 논리가 개인에게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지를 실존적으로 경험했던 적이 있었다. 조직 사건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복잡한 과정을 요구하는 이들이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도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명박 정권과 맞서 싸운다는 논리, 설령 그래서 이긴다 해도 지금 이 순간에 피해자가 느껴왔을 참혹함과 고통보다 그 결과가 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개인의 평온을 파괴하며 얻는 평화란 헛배부름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이미 깨어진 평온을 ‘평가’(절대 ‘이해’가 아니다)하기 위해, 그 폭력이 조직 전체의 것이라거나, 혹은 남성의 폭력이 훨씬 더 많다는 정량적인 이유를 근거로 해서 세상의 모든 폭력 중에서도 남성의 폭력이 더 정성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얘기하는 방식은 불편하다. 이번 사건은 민주노총 아니 민주노조 운동의 진보성을 보여주는 단면이긴 하지만 단층은 아니다.

조중동에 말리지 않는 상식과 원칙

민주노총 사건은 얼추 마무리가 되어간다. 조중동에 말릴 것이 두려워 범죄에 대한 판단을 유예했던 민주노총 집행부의 아둔함이 가슴 뻐근하다. 예민하고 선제적이 못했던 그 퇴행적 판단의 여파가 두고두고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쩜, 그리 무식했단 말인가. 하지만, 같은 무게 값으로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이 그렇다고 해서 조직의 도덕을 물으며, 조중동에 말릴 것이 뻔한 과정으로 치닫는 쾌도난마의 말들이다. 최연희가 성추행을 했으니 박근혜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상식과 원칙을 민주노총에도 견지하잔 말이다. 그걸 너무 현란한 테크닉으로 변칙 활용하는 조중동의 행태에 염증이 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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