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00년께 이집트 피라미드에 문자를 새겨 세태를 개탄한 이나, 지금 시내버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무례한 소음에 속으로 분을 삭이는 나 자신이나, 한때는 나이든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지청구의 대상인 ‘젊은것’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지금 바라보는 젊은것들만 역사 속에서 매우 특수한 품성을 지닌 찰나적 세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레토릭’일 뿐이다.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에는 평가적 가치가 부여될 수 없다. 인류역사만큼 유구한 이 레토릭과 함께, 젊은이를 지시대상으로 삼는 또다른 레토릭이 있으니, 바로 “너도 나이 들어봐라”(“나도 한때는…”)다. 이들 레토릭은 모두 젊음을 대상화하고 있지만, 전자는 (젊은 시절에 대한) 망각 속에서, 후자는 (젊음에 대한) 질투를 업고서 각각 작동한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에게도 나이든 사람에 대한 불변의 레토릭이 있을까? “노인은 염치가 없다” 정도가 겨우 떠오르는데, 젊은것들에 대한 레토릭에 필적하기에는 아무래도 벅차 보인다. 그보다는 고전에 기대보는 게 낫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놀랍게도 ‘수사학’은 영어로 ‘레토릭’에 해당한다)에서 노인을 ‘전성기를 지난 사람’으로 규정하고, 확신이 없고 실천력도 없는 노인의 성격은 젊은이의 성격과 정반대되는 것들로 이뤄져 있다며, 그 구성요소로 냉소, 의심, 편견, 옹졸, 인색, 비겁, 집착 등을 꼽았다. 플라톤과 더불어 고대 서양철학의 더블 포스트라는 그이의 노인관이 참으로 버르장머리 없어 민망하다. 정치인 정동영은 ‘노인 비하성(으로 오해할 만한) 발언’ 이후 5년째 금배지를 못달아 봤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를 했다면 어땠을까.

이처럼 ‘노인 공경’이 예외가 없는 미풍양속은 아니었다지만, 노인들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도 인류역사 전체로 놓고 보면 극히 예외적이다. 노인들은 오랫동안 생존을 위해 절대적인 지혜를 가진 원숙한 존재로 인정돼, 명예와 권력을 누렸다. (코미디 영화 <황산벌>에서는 신라 군대가 백제 군대를 궤멸하는 데 늙은 병졸들의 신경통이 주요한 전술요소로 그려진다.) 적어도 ‘쓸모’에 있어서 노인들의 값어치가 젊은이들보다 낮아진 것은 근대 이후다. 산업사회는 사람의 값어치를 ‘노동능력’, 곧 ‘근육의 힘’으로 따지기 시작했으며, 노인은 여성, 어린이와 더불어 열등한 존재로 전락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모든 젊은이는 과거의 어린이이자 미래의 노인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일대기는 자본주의 생애주기의 S라인 사이클을 온전히 따라가야 한다. 그래서 젊음과 늙음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보험회사에 의해 사오정, 오륙도 따위로 ‘지정’되는 것이다.

MBC선임자노조가 MBC 전체를 대신해 자발적(혹은 독단적)으로 한국사회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 뜬금없는 석고대죄에 후다닥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상찬’을 아끼지 않는 축들도 있는가 보다. 하지만 일회성 쓸모에 대한 눈치빠른 대응일 뿐 그 속내는 ‘공경’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아파 보인다. MBC선임자노조는 오히려 희화화되고 있다. 그들의 연출은 ‘장유유서’의 유교적 지배질서나 지혜로운 존재로서 ‘어르신’의 역할론에 기대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문법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지혜는 정작 모자랐다.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괘씸해 해봐야 때늦은 속앓이가 쉽게 풀리기는커녕 의심, 편견, 비겁, 집착 따위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노인관만 심화될 것이다. ‘나이의 상대성’ 같은 비빌 언덕도 사라지고 늙음의 이미지만 더욱 고착될 수밖에 없게 생겼다는 얘기다.

▲ 2월5일자 중앙일보 2면.
<미디어스>에서 가장 젊은 20대 중반의 송선영 기자가 그 소식을 듣고 대뜸 물었다. “왜 선임자/간부들은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킬까요?”라고. 웬 세대갈등 부추기는 망언? 뒤통수에 땀이 삐질 맺히는 걸 느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이 새내기 사회인의 말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내치기가 쉽지 않았다. YTN에서 후배들의 공정방송 투쟁을 억압하는 것도 일단의 간부들이고, KBS에서도 간부노조 사람이 정권의 KBS 장악 공모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거였다. (▷ 강동순 녹취록은 MBC선임자노조의 미래?) 송 기자 말대로라면 선임자/간부들이 일으키는 ‘문제’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늘어놓은 노인 성격의 모든 구성요소였다. 일부 현상만 가지고 나이든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넘어가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변명거리를 찾아 나섰다. 내가 아직 너무 젊어서일까?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해 전두엽만 근질거렸다. ‘단지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걸까?’로 질문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생물학적 현상이자 동시에 사회학적 현상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아지면서 기력이 떨어지는 건 여든 너머까지 연애를 했다던 파블로 피카소래도 피해갈 수 없는 몸의 현상이다. 그러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설정처럼 생물학적 나이를 거슬러 오를 도리는 없다 하더라도, 사회학적 나이가 생물학적 나이와 반드시 동행하는 것만도 아니다. 사회학적 나이는 한 사회가 개인이 보유한 자원에 대해 역할과 보상을 달리 매기는 것을 뜻한다. 잘 나가는 기업의 CEO가 생물학적 나이를 뛰어넘어 ‘불로의 상징’으로 표상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또한 사회학적 나이는 개인이 주관적 나이 관념에 따라 자신의 주체적 실천을 달리할 때 생물학적 나이와 거리를 둘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젊게 살려는 사람은 동년배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젊게 인식된다. (서태지의 나이는 몇 살일까?)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언론계의 선임자/간부들의 행태를 온전히 그들의 생물학적 나이 탓으로 환원하는 건 숙명론의 오류다. 그들이 패악질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건 사회학적 나이로 설명되어야 한다. 살다 보니 어느덧 집에서는 가솔을 주렁주렁 거느리게 되었고, 조직에서는 상명하달의 의사 결정과 집행 구조에서 상층부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시대적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 시대적 경험과 기억이 시대착오적이거나 퇴행적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박정희 독재시대에 젊은이들은 (저항문화를 실천한 일부를 제외하면) 개발이데올로기의 시대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고, 그 정체성은 시대의 변화와 동행하지 못하고 집단적으로 정체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사회학적 나이로 합리화하는 것도 출구가 없는 맹목적 환원론에 빠질 우려가 있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행동한다는 전제에서 보면 선임자/간부들의 현재 행태는 젊은 언론인들의 미래 행태일 뿐이다.

생물학적 나이의 교집합과 사회학적 나이의 교집합이 모든 선임자/간부 언론인의 정체성을 완결적으로 구성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 안에서의 차이가 생물학적/사회학적 세대 차이보다 클 수도 있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사이의 차이보다 동성애자 내부의 차이가 큰 경우도 있고,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차이보다 장애인 내부의 거리가 더 먼 경우도 있다. 모든 방송뉴스가 ‘땡전뉴스’를 만들던 시절에도 언론인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 가운데 일부가 지금, 정권과 자본의 이중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언론인들의 귀한 사표가 되고 있다. 그들은 제가끔의 사회학적 나이를 살고 있으며, 그들의 오늘은 제가끔의 어제의 삶이었다. 그들은 각자가 살아온 만큼 오늘을 살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 언론인으로서 제가끔의 삶을 사는 젊은것들은 머잖아 제가끔의 선임자/간부의 역할 모델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이 언설 또한 경계해야 할 지점이 있으니, ‘역사의 한 단면은 언제나 동어반복’이라는 숙명론과 환원론이다. 더 나은 급여, 더 그럴싸한 소속집단의 배후에 부나방처럼 뛰어들려는 예비언론인이 많고,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젊은 언론인이 많다면, 단연코 언론의 미래는 현재보다 나이지지 않거나, 오히려 더 일그러진 모습일 것이다. (난 이 대목에서 내가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보다 외려 비관적이다.) 오늘날, 당대의 모든 젊은 언론인들이 얼마나 자기 삶을 성찰하는지가 미래 언론의 풍경을 채울 것이다. 나아가, 나이가 들어 젊은것들에 대한 레토릭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의 선임자/간부들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기꺼이 그들의 망각을 헤집고 질투심을 들쑤실수록, 자신의 사회학적 나이는 (어쩔 수없이 먹어가는) 생물학적 나이로부터 좀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늙은이들은 최소한 젊은것들의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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