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지난 5일 프랑스·영국 순방 길에 올랐다. 이번 순방에는 KBS, MBC, SBS, YTN, 연합뉴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내일신문, 파이낸셜뉴스 등에 소속된 총 15명의 기자가 함께 했다.

특히 프랑스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방송장악’ 논란을 빚어지는 등 여러모로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건만 언론들은 주로 최 위원장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쓰는 식의 보도태도를 보여주고 있어 우려스럽다.

▲ 동아일보 9일자 5면

다음은 최 위원장의 유럽 방문에 대한 보도들이다.

“최 위원장은 KBS만큼은 시청률 경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장기적인 광고 폐지 필요성을 언급했다. 또 수신료 인상을 위해선 KBS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기 위한 자구 노력을 보여야 한다고도 말했다. 최시중 위원장은 방송법 개정과 관련해선 이른바 ‘떼법’이 우선시돼선 안 된다며 법 테두리 안에서 토론과 표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KBS 2월8일 <최시중 “KBS 광고 폐지 필요”>)

“미디어 융합과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미디어 산업 구조 개편이 세계적 추세임을 눈으로 새삼 확인했다. 세계 최고 기술과 인프라를 가진 우리가 정책 지체로 낙오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중앙일보 2월 9일 <“미디어 개편 세계적 추세인데 한국은 정책 지체돼 안타까워”>

“공영방송은 공영답고, 민영방송은 민영다운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프랑스에서 새삼 느꼈다. KBS가 앞으로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한쪽으로 치우친 방송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조선일보 2월 9일 <“공영은 공영답게, 민영은 민영답게”>

“미디어융합과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미디어 산업구조 개편이 세계적 추세임을 새삼 확인했다.”(동아일보 2월 9일 <“미디어산업 개편, 정책지체로 낙오”>

“최 위원장은 프랑스 미디어관련 부처 수장들과 회담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디어 융합과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미디어 산업구조 개편이 세계적 추세임을 확인했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인프라를 가진 우리가 정책적 지체로 낙오된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내일신문 2월 9일 <프랑스식 미디어개혁 한국에 적용>)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신문·방송 겸영과 대기업 방송시장 진출을 허용하는 미디어 관련법 처리가 지연되는데 대한 강한 아쉬움을 드러냈다.”(파이낸셜뉴스 2월 9일 <“佛 과감한 미디어 개혁 감명” 최시중 방통위장>)

‘미디어 산업구조 개편은 세계적 추세’ ‘방송법 개정과 관련해 떼법이 우선시돼선 안 된다’ 등 최 위원장의 주요 발언들은 정부·여당의 주요 레퍼토리다. 또, 최 위원장은 ‘KBS는 정권의 나팔수가 돼선 안 된다’라는 발언으로 ‘과거 KBS가 편향적이었고 이에 따라 개혁이 필요하다’는 한나라당식 논리를 추가하며 ‘공영방송법’ 행보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여론 다양성의 나라’라는 인식이 무색하게 프랑스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중이다.

거대 미디어그룹 육성이라는 사르코지 정부의 언론정책 근본기조는 언론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거대 미디어 그룹 육성’이라는 허울 뒤에는 권력과 자본이 지배하는 미디어로 만들기 위한 ‘방송장악’이라는 진짜 속내가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사르코지의 방송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인 500인 선언이 나왔고, 유럽기자연맹도 “EU 회원국 중에서 프랑스처럼 언론을 시장원칙에 방치하고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고 비판하고 나서기도 했다.

공영방송 광고 폐지, 정부의 공영방송 사장 임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방송법 개정안(5일 통과)에 대한 반대 여론도 거세다. 매년 방송 예산에 대해 정부의 심의를 받아야 하고, 사장의 임기도 보장받지 못하게 되는 등 공영방송사의 정치적 독립성이 심각하게 저해될 것이 분명해 연초부터 프랑스 언론인들은 반대집회를 열었다. 지난해 <르 파리지앵>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시민의 약 70%가 대통령의 공영방송 사장 임명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 경향신문 9일자 21면
반대하는 이들은 정부가 공영방송법 통과로 공영방송을 약화시키고, 사주가 사르코지와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는 TF1(민영방송)에 수혜를 주려 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대선 때 사르코지의 당선에 기여한 상업방송사들에 대해 정부가 ‘보답’을 한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나라의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프랑스 미디어 개편의 시사점을 보고 오겠다”며 떠난 최 위원장은 프랑스의 이같은 반대 여론에서는 어떠한 ‘시사점’도 못찾았던지, 프랑스 현지 기자간담회에서 ‘미디어 융합과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미디어 산업구조 개편이 역시 세계적 추세’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기자들은 위원장의 말만을 열심히 받아쓸 뿐이다.

동아일보는 “지상파 디지털의 출범으로 채널이 많아지고 시청자가 분산되는 상황에서 공영방송의 개혁이 불가피했다” “(프랑스 정부의 글로벌 미디어 그룹 육성 의지에 대해) 미디어 그룹이 고용과 매출에 있어 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전세계에 프랑스의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에 적극 추진하고 있다”는 베르나르 스피츠 인쇄매체발전대책위원회 총괄조정관 현지 인터뷰 내용을 전하며 정부·여당 언론법 개정의 불을 지피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9일자 5면 <“공영방송 광고폐지, 정체성 확립 메시지”>)

오히려 유럽에 가지도 않은 경향신문이 “현 정권은 결코 KBS가 정권을 편들어주는 방송이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라는 최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지난 1년 내내 KBS를 정권의 나팔수로 만드는 데 앞장선 장본인이 KBS 장악의 ‘마무리’ 발언을 외국에 나가서 했다”는 야당의 반박 등을 보도하며 최 위원장의 발언을 꼬집었을 뿐이다. (9일자 21면 <최시중 “KBS, 정권의 나팔수 반대”>

이번 취재는 방통위의 지원없이 100% 자비로 갔다고 하지만 아니감만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최 위원장은 9~10일 영국 런던을 방문하고 11일 돌아온다. 정치적으로 독립된 BBC 모델, 시장점유율 20% 이상인 전국 신문 사업자의 지상파 방송 소유 금지 등 영국 역시 우리나라에 던져주는 시사점이 많다.

부디 유럽 방문이 현정부의 언론 관계법 개정안 처리의 정당성(?) 재확인에 그치지 않도록 ‘앵무새 보도’를 하고 있는 언론의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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