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김종률 보도본부장이 기존에 익명으로 운영되던 KBS 디지털보도정보시스템(KNCS) 게시판을 실명제로 전환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KBS 기자협회(회장 민필규)가 ‘즉각 철회’를 요구하는 등 내부 구성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앞서 김종률 보도본부장은 지난 6일 오전 보도정보 게시판에 ‘익명게시판의 실명제 전환 공고’를 올려 “오늘(6일)부터 KBS디지털보도정보시스템(KNCS)에 기반한 ‘게시판’을 익명제에서 실명제로 전환할 것을 해당 관리팀에 통보한다”며 “최근 익명성에 기댄 비방과 욕설, 인권 침해적인 글들이 난무함으로써 보도게시판은 이제 ‘구성원 간의 이해증진과 친목 도모’라는 본래의 설치 목적은 사라지고 ‘편 가르기의 장(場)’으로 전락한 실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한 보도본부 소속 국장과 팀장들은 연석회의를 열어 ‘익명게시판의 폐해는 더 이상 눈감아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개선방안으로 실명제로 전환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해 본부장에게 건의했다”며 “익명제의 장점이 없지 않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동안의 폐해는 그 장점을 덮고도 남는다는 점에서 기자들의 넓은 이해와 양해를 바라며, 앞으로는 자신의 의견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떳떳이 밝히는 풍토가 정착돼 보도본부가 더욱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KBS 기자협회 “실명제 전환 배경 의심스러워”

KBS 기자협회(회장 민필규)는 “강제 실명제를 즉각 철회하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미디어스

기자협회는 6일 운영위원회를 통해 “아무런 사전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게시판 실명제 결정을 내린 것은 권한 밖의 일을 자행한 것으로, 절차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비민주적 폭거”라며 “최근 KBS 뉴스와 조직 운영에 대한 내부 비판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실명제를 전격 실행한 것은 그 배경이 극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기자협회는 실명제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기자들이 익명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블로그를 만들어 여기에 실린 글을 보도정보 자유게시판에 기자협회장의 이름으로 옮기고 △‘방송 모니터단’이 매일 실시하는 뉴스 모니터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며 △모든 네티즌들에게 공개되는 오픈 블로그를 만들어 기자들이 시민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기자협회는 이날 성명을 내어 “이번 결정에 사장이 개입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강제 실명제의 배경을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다”며 “자유로운 비판정신이 살아있고, 우리 뉴스는 물론 정부의 실책까지 날카롭게 비판하는 기자들의 소통공간을 회사가 정책적으로 죽이기에 나섰다”고 비난했다.

기자협회는 또 “실명과 익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민주적이고 일방적인 의사 결정 절차가 문제”라며 “이 문제는 게시판의 주인들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간부들은 게시판 강제 실명제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내부 구성원들 “MB 국정 철학 공유하려는 거냐?”

내부 구성원들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게시판 실명제와 더불어 해당 글을 읽고 찬성-반대를 할 수 있는 기능이 없어진 것과 관련해, KBS 기자들은 실명으로 반대 글을 올리는가 하면, 민필규 기자협회장 이름으로 반대의 글을 올리고 있다.

한 기자는 “비판의 칼날이 두렵냐. 대체 이번엔 누구 머리에서 그런 발상이 나왔냐”며 “잔디는 밟을수록 더 잘 자란다. 이 기회에 그동안 회색분자 같이 초심을 잊고 살았던 많은 기자들의 공분이 살아날 것”이라고 일갈했다.

다른 기자도 “조선시대에도 탈춤놀이를 막진 않았다. 유신시대에도 마스크 시위를 막진 않았다”며 “인터넷과 집회에서 익명성을 걷어치우는 게 MB의 국정 철학인가 했더니 ‘국영방송사’로서 그 철학을 공유하고 싶었냐”고 반문했다.

그는 “본부장이 말씀하신 익명의 부작용 모르는 백치, 이 공장에 없다. 하지만 익명 게시판은 또한 배설구의 기능도 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면서 “그런 배설구 조차 없어 불만이 막혀 쌓일 때 한꺼번에 폭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명심하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KBS 기자협회 성명 전문이다.

<강제 실명제>를 즉각 철회하라

기자협회 게시판이 실명제로 바뀌었다. 사전에 아무런 논의과정이 없었다. 게시판을 관리하고 있는 기자협회장에게 한마디 고지도 없었다. 국장과 팀장이 모여 “익명 게시판의 폐해는 더 이상 눈감아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투표기능까지 없앴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보도본부장은 익명 게시판이 “보도본부 구성원 간의 반목과 질시를 부추기는 진원지가 됐다”고 주장했다. “편 가르기의 장”으로 전락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 누가 “반목과 질시를 부추기”고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인가. 사전 논의도 없는 비민주적이고 일방적인 결정을 기자들이 따를 것이라고 믿었단 말인가. 이번 결정은 분명 보도본부에 “반목과 질시와 편가르기”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보도정보의 자유게시판은 기자협회의 것이다. 기자협회에서 제안해서 만들었다. 익명제도 기자협회에서 총의를 모아 결정했다. 삭제 권한과 관리권도 기자협회가 가지고 있다. 지난해 실명제 논란이 일었을 때 보도본부장은 기자협회에 논의를 맡겼다. 기자협회는 선거를 통해서 논의를 하자고 했고, 현 기자협회장은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실명제를 반대’하는 공약을 내세워 당선됐다. 기자협회원들의 자유로운 소통의 공간을 국장과 팀장들이 마음대로 손댈 권리는 없다. 본부장도 국장과 팀장도 협회원의 한 사람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권리만 가지고 있다.

게시판에 간혹 욕설이 올라오기도 한다. 때때로 인신공격이 행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자들이다. KBS뉴스를 책임지고 있는 기자들이다. 충분한 자체 정화 능력이 있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결국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간이 걸리고 힘든 과정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다. 집단 지성의 힘이다.

간부들의 이번 결정은 유치했다. 미네르바를 잡아넣으면 국민들이 안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번 정권보다 더 유치하다. 간부들의 이번 결정은 후배 기자들에 대한 배신이다. KBS 기자들의 지성을 믿지 못하는 행동이다. 간부들의 이번 결정은 불안감에 대한 자수행위다. 비판 한마디 쓴소리 한마디에도 참을 수 없이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이번 결정에 사장이 개입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강제 실명제의 배경을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비판정신이 살아있고, 우리 뉴스는 물론 정부의 실책까지 날카롭게 비판하는 기자들의 소통공간을 회사가 정책적으로 죽이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측은 내부 비판에 귀닫고, 사원들에게 재갈 물린 채 일방주의로 달리기만 하겠다는 것인가.

실명과 익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민주적이고 일방적인 의사 결정 절차가 문제다. 이 문제는 다시 게시판의 주인들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간부들은 게시판 강제 실명제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

2009년 2월 6일
KBS 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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