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기획, 약간의 종속, 스타 약간 합쳐서 전혀 못보던 ‘웰메이드’를 찍어내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도 여전히 ‘독립’이란 타이틀을 달고 세상과 만나는 영화들이 있다. 과문해서일까, ‘독립’소설, ‘독립’미술 같은 말들을 하진 않는 것 같다. 독립영화는 모든 영화가 보편의 것이 아니라는 언술인 동시에 어떤 특수한 영화는 여전히 세상과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이번 주 주말기획은 바로 <워낭소리>이다. 이 영화는 독특하다. 일단, 전혀 조미가 안 된 음식같다. 거짓말이 구조화되어 있는 시대에 만나는 낭만주의 같기도 하다. 관객 10만을 넘어 독립영화 사상 최고의 히트작을 향해 걷고 있는 이 영화의 미덕과 독립영화의 즐거움까지.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당신이 2009년 최고의 영화와 낯을 틀 기회는. 강추한다.

풍경화가 되어 버린 평화

▲ 다큐 '워낭소리' 포스터ⓒ워낭소리 블로그
연초에 제주도 강정마을에 다녀와서 글을 하나 썼었다. 논문 때문에 강정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내가 쓴 글을 보내주며 의견을 물었다. 친구의 적나라한 지적은 살짝 충격적이었다. 평소에 평화란 진공상태의 순백색의 상태, 혹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진흙탕과 같은 이 세상에서 온몸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의 지적은 나의 글에서는 마치 평화란 아름다운 제주도의 풍경과도 같은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삶과 괴리되어 풍경화로 존재하는 평화는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다.

<워낭소리>가 만들어내는 풍경소리 또한 비슷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철거촌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내가 사는 세상과는 완전하게 다른 세상의 느낌을 가진 풍경. 그곳은 이곳과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는 무균질의 공간이었다. 저 안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언어를 가지고 나와 비슷한 쌀밥을 먹으면 살아간다는 것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늙은 소의 일상을 아주 밀착해서 찍어낸 다큐에서 오히려 환상이 느껴지는 모순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영화는 철저히 서울사람들을 위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각박하고 살벌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과거의 추억과 여백의 위로를 전해주는. 고된 노동과 농가부채 이런 것들을 영화가 담아내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가 나를 포함해서 서울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못마땅한 것이다.

농촌은 서울의 식민지가 아니다

농촌이 평화롭다는 판타지는 도시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평화가 되는 순간 사람들의 삶은 박제화 되어 버린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온갖 추함과 부도덕함과 세속적인 욕망을 애써 무시하는 것은 그것들의 존재를 어설프게 찬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시골은 서울사람들의 정서적인 식민지가 아니다. 그곳에는 그곳에 사는 분들의 삶이 있고, 그 삶들은 결코 평화롭기만 하지도 않고, 아름답기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국근대화의 미명아래 농촌이 도시에 수탈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도시가 가지는 이 풍요함은 농촌이 흘린 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이제 와서 농촌의 아름다운 면만을 바라보며 우리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그곳에 사는 분들의 삶을 풍경화의 고정된 이미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던 것이다.

농약을 치지 않고 고집스레 소로 농사를 지으면 소죽을 쑤어 먹이고, 꼴을 베는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찬사 또한 왠지 뒤끝이 안좋았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은 기계와 물질문명이 주는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 세상의 누군가는 그런 것들과 담을 쌓고 자신들이 잃어가고 있는 것을 지켜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이 얼마나 비겁한 방식인가. 분명 기계문명의 문제점들을 인식은 하지만 자신의 그 편리함을 버리기는 싫고, 다만 누군가가 희생적으로 우리가 기계 이전에도 고귀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바란다. 그 역할을 농촌이 감당해야할 이유는 없다. 분명 기계문명이 가지고 온 여러 가지 문제들은 인류가 영속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지만, 그것을 농촌사람들에게만 떠넘겨서는 안된다. 아니 오히려 지구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도시 사람들이 더 민감하게 느끼고 삶을 성찰해야 한다.

▲ 다큐 '워낭소리' 캡처ⓒ워낭소리 블로그

영화의 미덕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낭소리>는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광화문에 있는 씨네큐브라는 영화관에서 조조할인으로 봤는데, 역시나 입소문 때문인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 들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관객수보다는 누가 영화를 보러왔는가였다. 한국에서 영화를 주로 소비하는 계층인 20, 30대 뿐만 아니라 중장년의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더러는 친구들과 함께 더러는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왔다.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처럼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그보다 더 결정적인 미덕은 영화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다. 영화와 TV드라마 등 현대의 매체들은 사실상 도시인들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되어 왔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남았던 <전원일기>가 사라진 이후 우리 사회는 의도적으로 농촌의 존재를 무시해왔는지도 모른다. 설날과 추석이 아니면 우리는 TV와 스크린에서 농촌을 볼 수 없었다. 도시가 아니라 농촌의 사람들, 풍경, 그곳의 생명이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지적한 도시인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마지막은 여러가지 안타까운 점에도 불구하고 <워낭소리>가 가지고 있는 진실성의 힘이다. 이것은 사실 영화가 가지는 힘이라기보다는 영화 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늙은 소의 삶이 가지는 진실성의 힘일 것이다. 감독은 엔딩 크레딧에서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했지만,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버지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주인공인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늙은 소의 삶이 얽혀 있는 관계와 매듭에 대한 영화로 읽히기 십상이다. 이는 그들의 삶이 단순히 부모, 혹은 아버지라는 언어의 프레임에 가두어 놓기엔 너무나 진실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할머니의 삶에 대한 의도적(감독이 아버지를 조명한다고 했으니)인 무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의 주름에 깊이 베어 있는 그녀 삶의 편린들에 감동받을 수 있는 것이다.

듣자하니 몇몇 언론들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내 못살게 굴려고 한다고 한다. 왜 그리들 예의가 없을까.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에 정말로 경의를 표한다면 그저 영화 보고 눈물 한 방울 흘리며 그 눈물에 자신만의 의미를 담아 슬쩍 훔치면 될 것을. 그 분들의 삶이 있어서 아름다운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지, 아름다운 영화를 위해 그 분들의 삶이 존재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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