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와 함께 흐르는 잔잔한 음악,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뜰 줄 모른다. 여기저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눈물을 닦느라 애쓰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환하게 조명이 켜진 뒤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워낭소리>에 대한 각양각색의 잔상이 남아 있다.

최 노인과 소,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워낭소리>가 연일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처음 7개 개봉관으로 시작한 <워낭소리>는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예매율 1위를 보이고 있으며, 언론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입소문을 타고 개봉관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부부는 갑작스레 인기스타가 되었고, 제작진은 언론의 취재 자제를 부탁하며 “제발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냥 놔달라”고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 5일 밤 서울 광화문 한 영화관에서 고영재 PD(왼쪽)와 이충렬 감독(가운데)이 <워낭소리> 상영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송선영
지난 5일 서울 광화문 한 영화관에서 <워낭소리> 상영이 끝난 뒤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제작진인 고영재 PD와 이충렬 감독은 예매율 1위 소식을 전하며 관객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워낭소리> 제작 배경, 뒷이야기를 비롯해 현재 할머니, 할아버지의 근황 등을 전했다.

“IMF가 터진 뒤 부모님, 그 중에서도 아버님께 죄스러웠다. 그래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했고,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소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기억 대부분이 아버지와 소였다. 너무 힘센 아버지와 소가 아닌, 늙고 낡고 장애가 있어야 그들의 헌신이 더욱 빛날 수 있겠다 싶었다. 지난 2005년 봉화축협이 연결해 줘 최 노인과 소를 만날 수 있었다.” (이충렬 감독)

이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기승전결이 갖춰져 있고, 극적인 구성으로 돼 있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서도 “만약 이 영화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출연한 이들이 아카데미 최고 연기상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이어 “영화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기본적인 인터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낯을 가리고, 카메라를 의식했으며, 사투리가 너무 심해 할머니가 없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며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없을 조건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영화 내내 워낭소리가 울리고,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워낭을 들고 있는 것은 소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며 “지금 농촌을 이야기할 때 과연 희망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결론을 내지 않았다”고 밝혔다.

▲ 5일 밤 서울 광화문 한 영화관에서 고영재PD와 이충렬 감독이 <워낭소리> 상영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송선영
‘관객과의 대화’ 이전, 영화사 사무실에서 만난 고영재 PD는 “<워낭소리>가 잔잔한 반향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블로그 활동 말고는 홍보 활동도 한 것이 없는데 예매율 1위까지 된 것은, 일종의 문화현상 같다”고 말했다.

고 PD가 꼽는 <워낭소리> 최고의 장면은 최 노인과 소가 함께 걷는 장면이다. 할아버지가 지게를 메고 소와 함께 느릿느릿 걷는 장면을 최고로 꼽으며 “지금 봐도 너무 좋다”고 말했다.

고 PD는 완성된 영화 편집본을 보자마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서 부모님이 떠올랐고, 바쁘게 살면서 잊혔던 것들이 생각났다”는 그는, 앞만 보고 챙기기에도 바쁜 각박한 현실, 영화에서 느낀 것들을 사람들과 교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고영재 PD와의 일문일답이다.

예매율 1위, 상영관 확대 등 반응이 폭발적이다. 어떤가?

처음 개봉관 수가 7개에 불과했지만 반응이 좋았다. 우리가 메이저 영화사, 배급사도 아니었기에 개봉관 수가 확대되었을 때도 똑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냐가 큰 고민이었다. 배급은 또다른 원리로 움직이기에 걱정이 됐다. 특히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경우, 주마다 신작 영화가 쏟아지기 때문에 눈치보고 내릴 때 확 내린다. 아트플러스시네마네트워크(독립영화 상영관) 극장의 한계가 있으니까 이런 배급 부분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제작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목적 자체가 ‘흥행’은 아니다. 이는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예매율 1위라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건 내가 볼 때 제작진 손도 이미 떠난 일종의 문화현상 같다. 홍보도 블로그 말고 한 게 없는데, 언론에서 보도해주기도 하고. (웃음)

이러한 폭발적인 반응, 예상했나?

이에 대한 대답은 나의 몫이 아닌 것 같다. 문화 비평 하는 분들이 평해야 할 것 같고, 평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 같다.
다만 부산국제영화제 때부터 느꼈던 것은 젊은 분들부터 연세 지긋하신 분까지 관객층이 다양했다. 사실 이는 제작진이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연세 드신 분들은 그분들대로 잃어버린 고향과 농촌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시는 것 같다. 소에 대해 ‘몇 kg이냐’며 무게를 따지고 한미 FTA,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반대 시대에 ‘소가 우리 사회에 있긴 했었구나’라고 떠올리는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은 경기가 너무 어렵고, 신자유주의 세계 광풍 가운데, 영화를 통해 농촌에 대한 풍경을 비롯해 할아버지를 통해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부분들이 잔잔한 반향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고영재 PD ⓒ송선영

<워낭소리>는 최노인과 소의 이야기다. 소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어서 만들게 된 건가?

이충렬 감독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이미 많은 언론에서 이야기했지만 <워낭소리>는 사실 아버지 이야기이다. 이 감독의 유년 시절 아버지의 모습은 소와 함께, 워낭소리와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IMF가 터지고, 하는 일마다 엎어져 이 감독이 좌절했을 때 아버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아버지와 소는 동일체였기에 이를 처음부터 기획하게 됐고, 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랑을 울리는’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한 바는 무엇인가?

완성된 영화 편집본을 보자마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영화를 보면서 부모님이 떠올랐고 바쁘게 살다보니 잊혔던 게 생각났다. 그런 것들을 ‘사람들과 교감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이 각박하다보니 자기 앞만 보고 챙기기도 바쁜 세상이다. 농약도 치지 않고, 묵묵하게 농사일을 하는 할아버지 모습 보면서 ‘이 사람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계신 분’이고 ‘의무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작기간 동안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던데, 어땠나?

<워낭소리>는 2005년부터 제작에 들어갔는데 촬영기간 동안 나는 <워낭소리> 제작자가 아니었다. 내가 제작한 <우리학교>가 2007년 3월29일 개봉했는데, 이 정도 반응은 아니지만 그때 상당히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이 영화가 정리될 즈음인 2007년 9월 이충렬 감독을 만났다. 당시 이 감독은 다듬어지지 않은 가편집본을 보여줬고, 조언을 달라고 했다. <우리학교> 개봉 이후 조언을 달라고 한 분이 많았기에 그런 분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해 가볍게 만났고, 소감을 전했다. 그러고 끝인 줄 알았는데 ‘이것을 영화로 하고 싶다’고 또 찾아오더라. 그래서 ‘영화로 하기에 지금 편집본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잘 만지면 될 거 같기도 하다’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원 제작자가 ‘너무 어려워 안되겠다’며 영화를 사가라고 했고, 이에 나는 ‘미안하지만 돈이 없다’고 답했다. 그 당시 <농민가> 제작에 들어간 상태였기에 정말 1주일을 괴로워했고,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일까’란 고민을 많이 했다.
처음 다듬어지지 않은 가편집본을 봤을 때의 그 느낌을 관객과 나누고 싶다는 결심이 서면서 <우리학교>의 마지막 남은 수익금을 원 제작자에게 주고 후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고난의 행군을 다시 하기 시작하게 된 거다. (웃음)
또, 감독이 엔딩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아주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이 감독의 편집 버전이 한 20개 정도 된 것 같다. HD작업이라 한 컷을 드러내면 믹싱, 자막 작업, 출력, 공정 등을 다시 해야 하는 등 과정이 복잡하다. 나중에 보면 크게 바뀐 것도 없었다. (하하) 감독한테 ‘개봉을 해야 손 털 것 같다’고 했는데, 개봉 거의 직전까지 손을 댔다.

제작자 입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할아버지와 소가 함께 걷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할아버지가 나무 짐을 지게에 메고 소와 함께 걷는 장면은 지금도 너무 좋다.

최근 블로그에 언론을 향해 취재를 자제해달라고 글을 올렸던데.

어떤 방송사에서 막무가내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취재하려고 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이런 언론이 있나’ 라는 생각에 무척 화가 많이 났고, 정말 고민도 많이 했다. ‘설마 영화를 내릴 거냐’라고 하시는데, 블로그에 올린 글은 정말 농담이 아니다. 만약에 어떤 사태가 벌어진다면 ‘차라리 상영을 말자’ 하고 진짜 영화를 내릴 생각이었다. 그 글을 올린 뒤 저녁에 깜짝 놀랐다. 보도자료를 뿌린 것도 아니었는데 여러 매체의 보도가 나왔고, 블로그 방문자수가 갑자기 증가했고, 다음 아고라에서는 청원까지 벌어졌다. 이는 <워낭소리>를 처음부터 좋게 봐주시고,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할아버지 성격이 화나면 장난 아니다. 말씀도 없으신 할아버지가 카메라를 막대기로 때리려고 해도 굳이 찍으려고 했을 정도라니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상 받고 내려갔을 때 할머니는 수다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가자마자 혼났다. 집으로 (취재 관련해) 전화가 오면 할머니는 이충렬 감독이 보낸 사람인 줄 알고 오라고 했는데, 만나보면 그게 아니었다는 거다. 취재 허락한 적이 없는데 마치 감언이설로 허락받은 것처럼 했으니, 할머니가 배신감을 느끼셨던 모양이다.
이런 부분이 다큐멘터리를 제작, 연출하는 모든 분들의 가장 어려운 부분일 거다. <우리학교>를 일본에서 상영했을 때, 촬영 허락을 받았음에도 영화 속 한 인물 부모님이 화를 많이 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극영화와 달라서 이런 부분이 힘들다.

▲ <워낭소리> 포스터. ⓒ워낭소리 블로그

대한민국에서 독립영화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독립영화는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시절에 태어났다. 민주화 과정 속에서 저항의 진지 역할을 담당했고, 군사 정부에 의해 획일화된 문화를 강요받던 젊은이들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문화에 대한 열망 같은 게 공존했던 거다. 지금은 독립영화도 어느 정도 산업화되어서 극장 개봉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은 지났다. 독립영화를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독립영화를 통한 시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건데, 지금은 서서히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는 단계이다. 과거에 비하면 여건은 좋아진 거다. 정부 지원은 퇴보했지만, 독립영화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좋은 여건이다. <워낭소리>에서 드러나듯 관객이 적극적으로 의사 표시를 한다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도 나이를 많이 먹었다. 새파란 청춘 때 라면으로 한 끼 때우면서 영화 찍는 시대도 아니다. 독립영화는 완성도 있는 영화를 통해 관객을 만나고 싶은 욕구와 갑갑한 현실과 정치 상황에서 오는 답답함 사이의 괴리가 담겨있다.

독립영화 프로듀서라는 직업이 생소하다.

다른 프로듀서의 경우 제작사라기보다 감독과 협력해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 같은데 나는 다르다.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해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역할을 비롯해 부가 판권까지. 전체적으로 총괄하는 개념의 프로듀서이다. 그런데 이런 프로듀서는 없었다고 하더라.(하하)

독립영화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독립영화가 있다면?

요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영화가 있는데 <똥파리>다. 보면 괴로운 영화이기도 하고, 폭력적 장면도 있긴 한데 영화를 보면서 에너지를 느꼈다.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력을 비롯해 굉장히 다의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배우의 연기력의 힘만 가지고 영화가 끝나버린다. 대단하다.

<워낭소리>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 자제분들에 관한 것이다. 설마 할머니 할아버지만 열심히 일해서 9남매가 그렇게 지냈겠나. 9남매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 놓고 꼴 베고, 농사하고, 그러면서 본인들도 자란 것이다. 할머니가 교육열이 높으셔서 특기 장학생으로 9남매를 학교에 보내셨다. 그러면서도 공부 못하면 혼내고, 성적 떨어지면 혼내고.
일각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은 여건에서 모시지 않고, 일을 하게 한다고 자제분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허름한 집을 다시 지어주는 게 효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기름보일러가 있는데도 아궁이를 고수하는 분이시다. 그러니 자식들이 어떻게 하겠나. 사실 지금 집을 불도저로 밀고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환경에 익숙한 분들인데 집을 고친다고 행복할까? 그건 아니다. 관객들이 이러한 점들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서 자기 부모 이야기 찍으면 자식들은 다 불효자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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