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가 고교등급제를 실시했다는 보도는 ‘진부한 새소식’이다. 지난 2004년, 고려대는 2005학년도 수시전형에서 ‘음성적인 노골성’을 드러내다 긴꼬리가 잡힌 ‘전과’가 있다. 그때는 비슷한 죄질의 대학들이 몇 군데 더 있었다. 모두 서울 소재의 내로라하는 사립대학들이었다. 지금이 그때와 다른 건 고려대의 단독범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그래서 물음의 맥락이 변했다는 것 정도다. “왜 고교등급제인가”에서 “왜 고려대인가”로.

왜 고교등급제인가, 그리고 왜 고려대인가?

‘학문’은 ‘양심’과 불가분의 관계다. 서로에 의존해 각자를 완성한다. 양심 없는 학문은 곡학이며, 학문 없는 양심은 오류 가능성에 대한 무방비다. 대학이 ‘진리의 전당’이라는 권위를 얻을 수 있는 건 그 사회가 대학의 양심에 대한 선험적 보증서를 발부했기 때문이다. 대학이 이런 전제를 배신하고 양심을 잃으면 그 폐해는 대학사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 전체를 호리는 무서운 범죄가 된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사학들이 양심을 팔아 야바위꾼보다 못한 협잡질을 일삼아 왔다. 고교등급제는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교수직을 매매하고, 재단 돈을 빼돌리고, 학교를 사고파는 범죄가 만연해 있고, 그 죄질 또한 결코 가볍다 할 수 없지만, 이 따위 찌질한 범죄는 그나마 피해범위가 제한적이다. 그러나 고교등급제는 모든 수험생과 그 수험생만 바라보는 학부모, 입시성적에 명운을 건 고등학교와 입시학원, 심지어 지역사회 단체장의 체면과 차기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폐해는 사회정의에 대한 믿음의 체계를 흔들어놓는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갈 수 있다’는 믿음은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다’는 믿음보다 훨씬 길고 강고했다.

왜 고교등급제였을까? 하고많은 협잡질 중에서 왜 하필? 이 물음을 좇아가다 보면 오늘날 한국사회 지배계급의 욕망과 만나게 된다. 비록 협잡질이라고 하나, 고교등급제에는 ‘우수학생 선발’과 ‘대학 경쟁력 강화’라는 때깔나는 명분이 있고, 전국의 고등학교를 한줄로 세워 서열을 매기는 권력도 누릴 수 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다른 사립대학들이 찌질한 돈 빼먹기에 열을 올릴 때 명문을 자처하는 이들은 협잡질마저 이처럼 격이 달랐다. 하지만 이들이 고교등급제에 몰입했던 것은 변학도의 기생 점고(點考-명부에다 일일이 점을 찍어 가면서 사람의 수효를 조사하는 일)처럼 권력감정에 도취된 탓만은 아니다.

개천에서 난 용 대신 양식장 장어떼를 선호하는 까닭

이들이 주장하는 고교등급제의 기대 효과는 말장난이거나 왜곡이다. 서울대가 재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추적조사한 결과를 보면, 내신 위주의 지역균형선발 출신 학생들의 학업성취가 수능 위주의 정시모집 선발 학생들보다 높다. 다른 대학들에서도 추이는 일관되게 나타난다. ‘우수학생’의 인자는 ‘특별한 목적’으로 세워진 고등학교를 다니며 사교육에 절여진 학생들이 아니라 지역에서 학교 공부 열심히 한 학생들에게 내장돼 있다는 얘기다. 대학 경쟁력을 높이려면 대학 들어와서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뽑아야 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협잡질까지 하며 정반대의 선택을 해온 것이다. 이렇게 사리분별 못하는 대학들에게서 경쟁력을 기대해도 좋은가?

이들이 고교등급제로 얻고자 하는 건 ‘대학 경쟁력’이 아니다. 다만 대학 경쟁력의 개념을 ‘학문의 경쟁력’보다 넓은 개념으로 확장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이들이 고교등급제에 몰입하는 진짜 이유가 있다. 이들이 고교등급제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기 대학 네트워크’의 사회지배력 강화다. 개천에서 난 용은 저홀로 용이지만, 양식장에서 건져 올린 장어떼는 수많은 남성의 정력을 뒷받침한다. 농촌지역에서 올라온 수재의 아버지는 농사꾼이지만, 특목고와 8학군 출신 사교육 선수들에게는 훨씬 넓고 큰 배후자원이 있다. 이들은 그 배후자원을 탐낸다.

이들 대학이 한사코 고교등급제를 탐내는 더 깊은 속내에는 ‘권력의지’를 넘어 ‘체제의지’가 숨어 있다. 이른바 명문대 동문회에는 대를 이어 회원이 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부모가 나온 대학을 자식들도 나오는 현상이 일반화되는 건 한국사회가 그만큼 계급 고착단계에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벌권력 안에 들어가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1세대가 자신의 자원으로 2세대를 길러 같은 학벌권력 안에 편입시키는 재생산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현행 대입제도는 이들이 보기에 여전히 재생산의 불확실성이 높다. 이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협잡이 고교등급제이다. 출신고교를 차별의 기제로 활용하는 신종 신분제이자 연좌제며, ‘신분의 폐쇄회로’를 완성하기 위한 기획이다.

신분 폐쇄회로 완성의 꿈과 이를 위한 ‘순교’

그럼 2009학년도에는 왜 고려대일까? 2005학년도와 2009학년도, 두 번의 고교등급제 파문에서 고려대가 보여준 태도에는 확연한 차이가 감지된다. 4년 전에는 관련 의혹들을 해명하느라 식은땀을 흘렸지만, 이젠 깨진 레코드처럼 “K값과 α값”만 되뇌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K값과 α값’이 무엇인가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고려대는 심지어 일선 고등학교 교사의 질의에 “당신이 뭔데 남의 입시에까지 관여하느냐. 업무방해를 하겠다는 것이냐”고까지 했다. 또 해당 학교 쪽에서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 질의하자 한 달 만에 보낸 A4 한 장짜리 답변서에서 “1단계 합격자들이 논술고사에 매진해야 할 시기이므로 사실이 아닌 의혹을 제기하여 혼란을 야기하면 또다른 학생의 피해가 염려”된다고 적었다. 해당 학교에는 3명의 1단계 합격자가 있었고, ‘피해가 염려되는 또다른 학생’이란 다름아닌 이들 3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겨레> 5일치 기사)

▲ 한겨레 5일치 5면 기사.
‘K값과 α값’이라는 선문답 같은 비공개 변수만으로 수험생과 그 수험생만 바라보는 학부모, 입시성적에 명운을 건 고등학교와 입시학원, 심지어 지역사회 단체장들의 들끓는 민심을 다스리겠다는 고려대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왜 고려대는 4년 전 다른 대학들과 나눠 맞던 돌팔매를 이번엔 혼자서 오롯이 감당하며 순교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믿는 신(神)은 누구이고, 그들이 따르는 교주는 또 누구일까? 현재 한국사회는 고소영 강부자의 지배력 아래 놓여 있다. 고려대는 그런 한국사회 학벌 네트워크의 최정점에 있다. 고려대로서는 두려울 것이 없고, 고교등급제는 고소영 강부자 학벌 네트워크의 순혈성을 높이기 위한 성스러운 사역일 뿐이다.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그들의 신문, 조중동

이로써 수험생과 그 수험생만 바라보는 학부모, 입시성적에 명운을 건 고등학교와 입시학원, 심지어 지역사회 단체장들의 민심이 들끓는데도 단 한 줄의 관련기사도 싣지 않고 있는 조중동의 행태에 대한 의문도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조중동은 그들을 위한 그들에 의한 그들의 신문이다. 왜 고교등급제일까? 오늘날 한국사회 지배계급의 적나라한 욕망이 이 협잡질에 고스란히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교등급제는 수험생과 그 수험생만 바라보는 학부모, 입시성적에 명운을 건 고등학교와 입시학원, 지역사회 단체장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훨씬 더 넓고도 근본적인 ‘체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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