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체포됐을 때, 나는 한겨레신문사 사회부 사건팀장을 맡고 있었다. 그가 검거된 직후부터 모든 신문·방송이 그를 ‘연쇄 살인범 유영철’이라고 부를 때, 한겨레는 끝까지 ‘연쇄 살인 피의자 유아무개씨’로 표기했다. 덕분에 독자들로부터 항의도 많이 받았다. “살인마를 비호하는 거냐” “한겨레만 익명 보도해봐야 아무 소용없는데, 혼자 옳은 체하려는 거냐” 따위였다. (당시 1심에서 유영철을 변론했던 변호사는 ‘사무실을 폭파하겠다’는 등 온갖 협박전화에 시달리다 못해 전화번호까지 바꿔야 했다.) 한겨레는 이번 경기 서남부 지역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얼굴을 공개하기는커녕 저 홀로 익명 보도를 하고 있다. 신문사로서도 고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4년 여 전 나도 그랬다. 하지만 난 그때 경험을 근거로 지금 한겨레의 익명 보도 방침을 적극 지지한다.

▲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피의자의 얼굴은 물론 실명도 공개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밝힌 한겨레 2월2일치 8면.
유영철은 21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유영철의 살해 대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상당수는 출장 성매매 여성들이었다. 성매매 여성들을 범행대상으로 삼기 전에는 노인들만 사는 부자동네 단독주택에 침입해 4건의 살인을 저질렀다.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으로 불린 그 사건은 한겨레가 단독보도했으나, 경찰은 연쇄살인 사건 가능성을 시종 부인하다 유영철을 검거한 뒤에야 동일범임을 확인했다. 유영철은 한겨레 보도가 나가자 한 달 정도 살인을 중단했다가 범행대상을 성매매 여성으로 바꾼 것으로 조사됐다. 한겨레 보도가 그의 살인행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는 지금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다. 연쇄살인을 부추겼다고 할 수는 없으나(그는 “붙잡히지만 않았으면 100명을 죽이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의도와 결과가 딴판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유영철 마스크를 벗기려 했던 일본 후지TV

▲ 연쇄 살인범 유영철을 소재로 한 영화 ‘추격자’ 포스터.
2년 가까이 지난 2006년 봄, 나는 유영철 사건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이른바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 정남규가 검거됐다. 정남규가 저지른 살인 가운데는 ‘이문동 20대 여성 살인’이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미 2년 전 유영철이 저지른 살인에 포함돼 기소까지 됐던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요란한 퍼포먼스와 함께. 유영철이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되던 날이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수갑을 찬 채 경찰서 현관을 나오던 유영철에게 이문동 여성 피해자의 어머니가 “내 딸 살려내라”며 달려들다가, 유영철을 호송하던 경찰관이 뻗은 발길에 가슴을 부딪혀 나뒹굴었다. 석간신문과 방송은 “피해자 유족보다 살인마 보호가 더 우선인가”라며 경찰을 맹비난했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그 어머니가 경찰서에 오게 된 과정을 확인하도록 현장기자들을 다그쳤다.

몇차례 추가 취재를 통해 어렵게 확인된 사실은 일본 후지TV가 전날 그 어머니를 만나 설득한 뒤 당일 취재차에 태워왔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다른 카메라들이 모두 유영철을 향하고 있을 때 후지TV는 그 어머니가 포토라인을 뚫고 유영철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부터 나뒹구는 장면까지 전 과정을 촬영하는 ‘국제적 특종’을 할 수 있었다. 대신 한겨레는 후지TV의 연출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후지TV 쪽이 그 어머니에게 “기자회견장에서 유영철의 모자를 벗기면 사례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는 더 깊숙한 ‘비밀’은 그러고도 한참 뒤에야, 당시 사건 수사 간부가 입을 열면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고 세간의 주목도 끌지 못했다. 물론 2년 전 오보에 대해 정정 보도를 한 언론도 없었다. 먼 훗날 ‘그때를 아십니까’ ‘타임머신’ 따위 TV 프로그램에서나 다시 등장할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 에피소드를 근거로 전가의 보도처럼 ‘무죄추정의 원칙’을 주장할 뜻은 없다. 하지만, 이번 경기 서남부 사건에서 거론되는 ‘일본 언론의 흉악범 얼굴 공개’ 이유가 대다수 한국언론의 주장처럼 ‘범죄예방 및 재범방지 등 사회적 공익’만을 위한 것인지 따져볼 근거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기꺼이 제 돈까지 들이며 피의자의 마스크를 벗겨내려는 일본언론의 선정주의는 과연 우리에게 귀감인가. 이번 사건의 피의자 얼굴 공개에 앞장선 조·중·동이 언제부터 그토록 국민의 알권리와 사회적 공익에 힘써왔기에 하필 이때 이토록 지사(志士)적 자세로 열을 올리는지, 짐짓 자기들도 처음부터 조·중·동과 같은 생각이었다는 듯 허겁지겁 뒤쫓아가는 (방송3사를 비롯한) ‘나머지 언론’의 따라쟁이 태도는 왜 세월이 가도 변함이 없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 그보다 더 요령부득인 것은 얼굴 공개에 대한 찬성 여론 비율이 무려 95%라는 점이다(중앙일보 라이브폴 결과).

여성할례 금지는 보편적 인권 보호인가?

‘인권’은 꽤나 까다로운 개념이다. 흔히 인권은 ‘보편적’이라고 인식되지만 ‘보편적 인권’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어디까지가 보편적인가 하는 문제는 인권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거리다. 이를테면 공화주의 국가인 프랑스가 아랍계 공립학교 여학생들에 대해 (공적 장소에서 종교성을 드러낸다는 이유와 함께) 여성 차별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것은 인권을 옹호하는 것일까, 거꾸로 침해하는 것일까. 몇 해 전 프랑스 정부가 실제로 아랍계 공립학교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을 금지했다가 여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등교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다면 이집트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지금도 시행되고 있는 여성 할례는 어떤가. 그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너무 심한’ 기준은 도대체 뭘까?

억압적인 문화와 관습을 철폐해야 한다는 보편 담론을 인정하는 것과 이를 적용하고 관철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더욱이, 현실에서는 지극히 양가적인 사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미성년자의 인권은 약자로서 보호적 가치와 인격체로서 자기결정권 보장의 가치가 경합하는 문제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 텍사스주는 미성년자의 성관계를 금지한다. (지명과 사건 기술이 정확한지, 또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 글에 등장하는 실화는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소년-소녀가 성관계를 맺었다. 소녀는 처벌을 면했지만 소년은 감옥에 갔다. 나이가 몇 살 많은 소년은 감옥에서 성인이 되었다. 출소 뒤 소년과 소녀는 다시 사랑을 나눴다. 소년은 같은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이 법은 반인권적인 미성년자 성 약취를 막기 위한 법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관습의 제도화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성년자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반인권적 법이기도 하다.

이 사례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피의자의 인권 문제가 보편적 인권에 관한 전형적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인 것은 틀림없다. 형사 피의자라도, 옥소리의 인권과 성폭력 남성의 인권은 적용 대상과 범주가 전혀 달라야 한다. 옥소리는 형사 피의자로서 뿐 아니라 여성, 국가주의적 제도(간통죄)의 피해자라는 복합적인 인격으로서 인권 보호의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자신의 ‘범죄행위’도 그 행위 여부가 아닌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놓고 유무죄를 다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성폭력 남성의 범죄는 그의 범죄 자체가 반인권적이기에 그런 요구가 성립할 수 없다. 성폭력 남성의 인권은 형사 피의자로서 인권, 다시 말해 피의자일지라도 국가의 부당한 억압으로부터 보호받을 인권만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인권이란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권, 상대적 가치이자 약자 권리 확장 위한 지향적 가치

인권은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가치가 아니다. 옥소리에 적용된 가치를 성폭력범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인권은 이렇듯 ‘상황’과 ‘관계’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판단에는 필연적으로 ‘권력관계’가 개입한다. 유감스럽게도 인권은 하늘이 부여해준 것(천부인권)이 아니라 약자에 대해 강자가 보장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자의 선의지만으로 보장되지도 않는다. 약자의 요구와 투쟁을 통해 ‘권리’로서 쟁취되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독특한 위상의 독립 국가기구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최상위 권력인 국가가 삼권분립의 내부 견제장치만으로 약자인 국민의 인권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약자의 (투쟁적) 요구와 이를 통한 국가의 (시혜적) 제도화라는 국가인권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기구다. 인권은 상황과 권력관계가 얽힌 상대적 가치이자, 그럼에도 권력에 맞서 일관되게 요구해야 하는 가치다. 인권의 보편성이란 가치기준으로서 보편성이 아니라 약자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지향적 과정으로서 보편성인 셈이다.

그럼 다시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피의자의 인권 문제로 돌아가 보자. 그의 자백과 증거 등을 통해 볼 때 그의 반인권적 범죄 행위는 이미 확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범죄를 확정하기 위한 제도적 절차를 건너뛸 수는 없겠지만, 사법적으로 그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용서할 수 있는 여지도 거의 없어 보인다. 그에 대한 사법적 심판과는 별개로 여론의 단죄는 선행할 수 있고, 추정되는 죄질로 볼 때 여론의 관용을 기대할 수도 없다. 그를 ‘살인마’로 부르는 것도 평판의 영역에서는 가능하다. (언론은 평판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마저도 신중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에게 있어 피의자로서 인권은 그를 살인마로 부를 수 있느냐 없느냐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얼굴 공개에 반대하는 태도는 얼핏 그를 위해 피의자 인권이라는 무차별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잘라 말해, 그의 얼굴 공개를 반대하는 것은 피의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이다.

▲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피의자의 얼굴 사진을 가장 먼저 공개하고 나선 조선일보의 1월31일치 1면.
얼굴공개 다음은 사이버모욕죄…우리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해서야

연쇄 살인범도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약자이고, 약자의 인권은 개인 인격의 선악 분별 너머의 문제다. 그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은 무죄 추정의 원칙 문제나 개인 초상권의 문제이기 전에 ‘인권에 대한 지향’의 문제다. 더구나 국민의 알권리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문제다. 국민의 알권리는 ‘진실’에 관한 문제다. 이를테면 삼성 엑스파일 녹취록은 진실의 문제이기에 국민에게 마땅히 공개되어야 했지만, 그의 얼굴은 사건의 진실은커녕 (사법적으로 관상학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의 인격의 진실과도 무관하다. 사회적 공익에 대한 언설은 완전히 허구의 논리다. 얼굴 공개로 범죄 예방 효과를 얻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자의적이다. 사법정의를 바로세우는 게 우선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90년대 연쇄살인집단 막가파가 ‘반성’ 대신 했던 말이다. 수천억원 상속세를 탈루한 재벌 회장들과 아들 대신 술집 웨이터에게 각목을 휘둘렀던 재벌 회장은 지금도 안녕하다.

연쇄 살인범의 얼굴은 사회적 약자 누구에게도 실체적 보상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무능한 수사당국과 문란한 사법체계에 면죄부만 줄 뿐이다. 더 큰 위험은 국가가 약자의 인권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용인의 메시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실명제와 사이버 모욕죄 같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억압하는 제도를 한사코 지지하고,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논객의 익명성을 범죄와 동일시하는 조·중·동이 가장 먼저 연쇄 살인범 얼굴을 공개하고 나선 것이 우연으로만 보이는가. ‘인권의 자리는 언제나 취약하다’는, 그래서 ‘약자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지향적 과정이 중요하다’는 인권의 보편적 속성은 인권의 임의적 적용과 배제가 매우 위험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반인권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쇄 살인범의 얼굴 공개에 대한 95%의 지지는 두렵고도 안타까운 현상이다. 이 다음은 인터넷 실명제와 사이버 모욕죄다. 사회적 약자인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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