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시를 지켜왔던 배트맨과 지구를 구하는 슈퍼맨이 싸운다. 이른바 '정의'의 가치를 두고 싸우는 '저스티스 리그'란다. 그런데 두 영웅도 부족해서 떼거리로 편을 먹고 싸우겠단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그렇다. 지구를 지키던 영웅들이, 각자가 가진 트라우마와 가치관의 혼돈으로 오히려 지구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렇게 영웅도 고민하고 고뇌하는 시대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우리가 위험에 빠졌을 때 우리를 구하러 나타나는 슈퍼맨은 영화에서 봤던 그들이 아니다. 사람인 소방관들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그들에게 영화 속 영웅들보다도 더한 짐을 지운다. 차마 인간의 영역으론 감당하기 힘든. 4월 24일 방영된 <SBS 스페셜>은 소방관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슈퍼맨의 비애- 소방관의 SOS>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인권의 사각지대로 보아야 할 소방관들의 열악한 현실을, 우리가 소방관을 부를 때 사용하는 119번 대신 119명의 소방관들의 속내를 통해 털어놓는다.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아이들과 함께 죽고 싶어요'

'희망 TV'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도네이션에 참여했던 류수영이 눈물 흘리는 소방관의 모습으로 시작된 다큐. 거기서 만난 소방관들은 사고가 일어나는 현장 그 어느 곳에나 나타나 현실의 슈퍼맨이 된 영웅들이 아니다. 이제는 영웅의 무게 대신에 자신이 겪었던 상처와 가치관으로 인해 고뇌하는 영화 속 영웅들처럼, 첫 출동 현장부터의 기억조차 켜켜이 자신 속에 쌓아둔 상흔이 깊은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현실의 슈퍼맨, 소방관의 정신적 고통

SBS 스페셜 <슈퍼맨의 비애 - 소방관의 SOS> 편

이미 우리는 각종 뉴스나 사건 등을 통해 지방직 공무원인 소방관이 안전 장비를 자신의 돈으로 사서 충당해야 하는 열악한 현실에 대해 접한 바 있다. 그러나 다큐는 소방관의 열악한 현실은 사고 혹은 화재 현장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미흡한 안전장비뿐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소방관의 날, 미국에선 매년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방관들이 퍼레이드를 벌이고 대통령이 나와 한 해 동안 순직한 소방관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 된 소방관과 달리, 우리의 현실은 퍼레이드는커녕 겨우 200여 명의 관계자가 모인 초라한 기념식에서 드러난다.

다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미흡한 장비와 열악한 사회적 처우, 그 모든 것들을 넘어 현재 국민안전처 조사 통계상 최근 5년간 순직 27명, 그 배를 넘는 자살자 41명의 현실을 다룬다. 심지어 2015년에는 순직한 소방관 수의 여섯 배에 달하는 소방관들이 자살을 했다. 그리고 드러난 통계 아래 100명 중 한 명은 하루 종일 죽음을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40%가 우울증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 최고 감정 노동자 소방관들이 있다.

소방관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소방관 예비 후보생들의 정신 건강을 조사해 보면 그들은 또래 젊은이들보다 건강한 정신 상태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청년들이 소방관이 되어 맞닥뜨린 현실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터뷰에 응한 119명의 소방관들, 그들 중 상당수가 첫 출동에서 마주친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고 현장에서 구하지 못한 아이, 할머니, 그리고 신체가 훼손된 사상자들을 마음의 준비 없이 마주친 소방관들은, 하지만 그 트라우마를 치유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사고 현장으로 출동을 거듭하며 마음의 상처를 키워간다.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그들의 직업이, 현장에서 누군가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고통으로 고스란히 쌓여가며 자신을 상처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구하지 못했던 고통은 자기 자식에 대한 학대나 자살 충동으로, 그리고 결국은 현장을 떠나거나 소방관이란 직업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우울증의 늪으로 소방관들을 끌어들인다.

SBS 스페셜 <슈퍼맨의 비애 - 소방관의 SOS> 편

그러나 그들의 고통에 대해 사회의 반응은 냉정하다. 사람을 구하는 그들의 직업을 당연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주취자의 폭력이나 이유 없는 감정적 반응, 심지어 출동 현장에서 불가피한 재산 손실까지 따져 묻는 이기적 행태 등이 사회의 슈퍼맨 소방관들의 자부심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출동 현장에서 문을 파손하는 대신 더 위험한 고공 줄타기를 감수하도록 하는 현실이 바로 소방관들을 정신적 고통으로 몰아넣는 또 다른 원인이 된다.

“하늘나라에서는 소방관 하지 마. 우리 이제 소방관 하지 말자...”

뿐만 아니라 2001년 홍제동 사고 현장에서 순직한 여섯 명의 소방관들처럼, 현장에서 사고로 동료들을 잃는 경험도 소방관들에겐 치유되지 않는 상처다. 함께 생활했던 동료나 선배들을 사고로 잃는 고통도 무색하게,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처리해야 하는 그 직업적 아이러니가 소방관들의 고통을 더 깊게 한다.

감정 노동자로서의 소방관의 인권

출동 현장에서 만난 예기치 못한 죽음, 그리고 동료를 잃은 충격 등은 치료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지고 이는 우울증을 넘어 자살을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안 그래도 직업적 특수성으로 인해 평균 수명이 가장 짧은 소방관들은 정신적 고통까지 짊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다큐는 밝힌다.

SBS 스페셜 <슈퍼맨의 비애 - 소방관의 SOS> 편

하지만 현실은 열악하다. 해마다 늘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든 소방 예산으론 소방관들의 정신 건강을 돌볼 여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사 결과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인 소방관들의 70%가 치료를 거부한다고 한다. 즉 상당수의 소방관들이 소방관으로서의 자부심과 정신적 부담을 혼돈하거나, 자신들이 안고 가는 정신적 부담을 소방관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로 인해 승진 등의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소방관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국민 1300명이란 열악한 현실은 소방관들이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게 한다.

4월 24일 방영된 <슈퍼맨의 비애-소방관의 SOS>는 인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소방관의 직업을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의 의식 저 너머에서 신음하고 있는 소방관의 인권을 끄집어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사회적 복무가 그 일이 된 직업군을 '감정 노동자'로 규정하고, 소방관 개인의 정신적 고통을 사회적 문제로 공론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는 곧 사회 혹은 집단이라는 전체를 우선시해온 우리 사회의 사고방식, 시스템을 반성하는 진지한 첫 걸음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가 영화 속 슈퍼맨에 열광하고 그들의 고뇌에 공감하는 만큼, 우리 사회의 슈퍼맨들의 현실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다큐는 간곡히 설득한다. 바로 이것이 현실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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