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철거지역에서 참사가 발생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최대 쟁점인 경찰과 용역직원들이 합동으로 진압에 들어갔는지 여부에 대해서 검찰은 아직 수사를 끝내지 못한 채 결과 발표를 미루고 있다. 와중에 언론은 경찰 체증 동영상과 용역과 경찰의 무선교신 등에 대한 분석 결과를 두고 서로 양분되어 “진압작전에 용역회사 직원들이 참여할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와 “당초 경찰의 해명과는 달리 건물 안에 용역 직원들이 있었으며 합동 진압했다고 봐야 한다”로 진실게임을 시작한 지 오래다. 그뿐이랴? 조선·중앙·동아일보는 서로 앞다투어 전국철거민연합회(약칭 전철연)의 배후설에 힘을 싣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오늘 재밌는 두 사설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일보의 사설 “‘김석기 거취’는 한국 사회 이성의 숙제”라는 것과 한겨레의 사설 “인명을 어쩌면 이리도 하찮게 여길까”가 그것이다. 용산참사를 ‘이성’적으로 봐야 한다는 중앙일보와 ‘감성’적으로 봐야 한다는 한겨레.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까.

▲ 1월 28일자 중앙일보 사설
◇용산 참사 사건 ‘이성’이 필요하다는 중앙일보 :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의 거취는 한국 사회의 성숙도를 시험하는 중요한 숙제다”라는 입장을 내세웠다. 중앙일보는 “그는 이유 없이 물러나도 안되고, 물러나야 하는데 버텨서도 안된다”며, 이것이 한국사회 ‘이성’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중앙일보는 “사망자 발생과 문책은 별개의 문제다”며 “선진국에선 피의자들의 상당한 희생이 발생해도 정당한 법 집행이라면 경찰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당한 법 집행을 하고도 문책을 받는다면 공권력이 무력화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설명이다.

이 때문에 “수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야당이나 시민단체가 거리투쟁에 나서는 것은 사건의 진실이라는 이성보다는 사람이 다수 죽었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사망자 발생과 문책은 별개의 문제라는 말이다. 결국 중앙일보는 “김 후보자의 거취는 경찰이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며 “이것이 이성이다”라고 끝맺었다.

▲ 1월 28일자 한겨레 사설
◇용산 참사 사건 ‘감성’이 필요하다는 한겨레 : 한겨레는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원장의 “용산 참사를 법질서 확립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 것을 빗대어 “공권력에 저항할 경우 떼죽음이 수반되는 진압작전도 감행할 수 있고,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몸부림치다가는 그렇게 불태워질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며 소름끼친다고 비판했다. 또한 “어떻게 저리도 인명을 하찮게 여길 수 있는 걸까”라고 개탄했다.

한겨레는 “이번 참사는 이미 드러나고 있듯이 경찰 수뇌부의 무모한 특공대 투입과 과잉 진압작전에서 비롯됐다”며 “개발업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섣불리 중립을 포기한 경찰과 이 정권의 편향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걸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호도하려는 건 가당찮다”는 것이 한겨레의 입장이다.

나아가 “하다못해 봉건왕조조차 인사사고에 대해서는 그것이 과실이라 해도 무한대의 책임을 지웠다”며 “거기에 대해 정당한 공무집행 운운하거나 법질서 확립 계기 운운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협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만으로 혹은 ‘감성’만으로는 설득되지 않는다

중앙일보와 한겨레의 주장은 일직선과도 같았다. 중앙일보는 용산참사와 관련해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를 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한다고 했다.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거취가 ‘왜’ 한국사회의 성숙도를 나타내는지는 모르겠으나 용산 참사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 한겨레는 용산참사를 두고 ‘무모한 특공대 투입’, ‘과잉진압’이 있었다며, 그것을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호도하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겨레는 봉건왕조를 거론하며 “인사사고에 대해서 그것이 ‘과실’이라 해도 무한대의 책임을 지웠다”고 했는데 그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늘자 중앙일보와 한겨레 사설은 각각 무엇이 문제였을까.

중앙일보가 이야기하는 ‘이성’이라는 것은 ‘도구적’ 이성에 불과하다. 중앙일보가 사설에서 이야기한 ‘이성’은 어떤 사안에 대한 문제점 고찰과 가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이 합리적인 사고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딱 ‘도구적 이성’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중앙일보는 용산참사를 두고 얼마나 진실한 기사를 써왔는가. ‘화염병’, ‘폭력시위’, ‘보상금’만을 부각시킨 채 지금은 ‘전철연’이 배후라고 지목하며 토끼몰이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입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아직까지도 신개발주의를 선동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모든 것을 뛰어넘고 ‘김석기’ 내정자에 대해서만 이성적으로 판단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국민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사고만을 ‘고집’하는 것에 불과하다. 바로 ‘도구적 이성’을 말이다.

그에 반해 한겨레는 사설에서 “인명을 어쩌면 이리도 하찮게 여길까”라고 했다. 그러나 한겨레가 사설에서 주장하는 ‘감성’만으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감성에 대한 호소는 단지 국민들의 지지만을 이끌어 낼 뿐이다. 다른 조건과 환경은 무시하고 오늘자 중앙일보와 한겨레 사설만 두고 본다면 오히려 중앙일보 사설에 설득되기 십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만큼 ‘감성’에 기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감성’이라 하는 것은 그 본질 자체를 설득할 수 없기 때문에 또다른 ‘감성’이 나타나면 그에 대한 지지세력은 바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 한겨레 사설이 아쉬운 이유이다.

중앙일보와 한겨레는 용산참사를 각자의 시선으로 설명하지만 그 안에는 둘 다 허점과 한계가 있다.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바라본 탓이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이 때문에 ‘도구적 이성’으로 설득되지 않고 ‘감성’만으로도 설득되지 않는다. 이것이 중앙일보와 한겨레 읽기에 앞서 조심해야 하는 대목이다. ‘이성’과 ‘감성’을 잘 챙기고 용산참사의 본질을 바라볼 때다. 그 본질은 용산참사의 앙상한 물리적 원인도, 낭자한 결과도 아니다. 양쪽 모두 놓친 건 이런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그 너머의 지배질서다. 중앙일보는 참으로 도구적이었고, 한겨레는 아쉽게도 본질을 꿰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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