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했던 모험의 시대, 대항해시대

인류에게 모험은 매우 오래전부터 인기 높은 이야깃거리였다. 최초의 서사시로 불리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절대악의 타도, 권력의 쟁취에 이어 최종적으로 ‘불사’라는 궁극의 목표까지 탐내었던 욕망의 이야기를 다룬 모험담이었다. 욕망하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 꿀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꿈이 아마도 모험이었을 것이다.

모험이라는 개념 안에는 근본적으로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과 성공했을 때의 거대한 보상이 포함되어 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갖는 도박 같은 재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다만 이를 현실 세계에서 수행하는 것은 그 ‘하이리턴’의 부담감이 너무 컸기에 대부분 상상의 영역에서 모험의 재미를 누리는 데에 그쳤다. 그 결과가 각종 모험담과 서사시, 영웅 신화와 모험 소설이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도 이따금씩 모험의 시대가 찾아오곤 한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정보기술을 통해 열린 새로운 가상공간의 출현으로 수많은 ‘벤처’기업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볼 때도 언제나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관의 규모를 넘어서는 그 무엇의 가능성이 등장할 때마다 모험은 현실의 그것이 되곤 했다. 막대한 부와 권력, 지금의 삶을 한 순간에 바꿀 수 있는 거대한 기회의 등장은 수많은 모험을 낳았다. 조금 더 과거로 가본다면 미국 서부개척 시대의 골드러시 대모험이 있었고, 그보다 조금 더 올라가 보면 근대 인류 체제의 기초가 된 거대한 모험담의 시대가 존재한다. ‘지리상의 발견’, ‘대항해시대’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역사 속의 이 시기를 다룬 꽤나 유명한 고전 게임이 오늘 이야기할 게임 <대항해시대>다.

모험 매체로서의 게임: 관람에서 체험으로

모험에 대한 동경은 원시시대부터 이어져 왔는데, 특히 게임에서 모험의 의미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기존의 매체들이 그려낸 모험은 어쨌건 수용자에겐 관람의 형태였지만 게임에서는 ‘체험’의 형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위험천만한 세계로 직접 발을 담가야 하는 것은 플레이어의 의사결정이기 때문에 모험의 긴장감은 타 매체에 비해 남다르게 뛰어나지만, 동시에 이는 분명히 현실과 구분된 가상의 모험이기에 리스크가 없다는 게임 매체의 환경은 모험 서사가 게임의 주류를 차지하게 만든 배경이었다.

게임 <대항해시대> 또한 모험을 다룬다는 주제 면에서는 다른 게임들과 비슷하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현실에 존재했던, 역사 속의 모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이름모를 괴수들과 싸워 나가는 가상의 이야기가 대세이던 게임들 사이에서 <대항해시대>는 역사물을 지향했다. 게임에 등장하는 지도는 실제 지구의 모습을 가져온 것이고, 2편에서는 메르카토르 같은 실존인물들이 게임 속 주요 등장인물로 얼굴을 비추기도 한다.

<대항해시대 2>에서 지리학자로 등장하는 메르카토르. 메르카토르 도법의 창시자인 실존 인물로, 게임 내에서는 지도탐험 노가다의 원흉으로 등장한다.

총 4편에 걸친(5편도 발매되었으나, 지나치게 떨어지는 퀄리티로 인해 여기서는 배제한다) 시리즈 내에서 게임 속의 시간은 조금씩 시대를 달리한다. 1편은 포르투갈이 이제 막 대양 진출을 시작한 직후 정도의 시간대이고, 2편에서는 서서히 상업함대들이 세계를 누비기 시작하는 단계다. 이야기보다는 자유도에 치중한 3편을 살짝 건너 뛰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온 4편에서는 이제 전 세계가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에 뛰어드는 진정한 무역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모두가 부와 명예를 위해 미지의 대양으로 뛰어드는 시대 속에서 플레이어 또한 그 일원이 되어 항해에 나서는 것이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골자다. 작은 배 한 척으로 시작한 모험은 돈이 되는 무역 루트를 타고 점점 더 규모를 더해 가며, 그 와중에 만나는 해적과 적대자들, 전쟁과 갈등들이 뒤엉키며 모험가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실제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각 게임이 등장했던 시절에는 많은 학생들이 ‘사회과 부도’를 펼쳐 들고 세계 구석구석의 항구 위치를 위도와 경도에 맞추어 살피며 항해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던 게임이 <대항해시대> 시리즈다.

모험을 만드는 3요소: 롤플레잉 + 경영시뮬레이션 + 플레이어의 사전지식

<대항해시대>는 장르 구분을 따지자면 롤플레잉 게임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주인공은 시나리오속에서 경험치를 쌓아 레벨이 올라가고, 함선은 장비 구입과 개조를 통해 업그레이드되며 나름의 목표를 향해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이다. 형식 면에서는 고전 롤플레잉 게임과 많이 닮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래 그림과 같이 2차원 필드인 사각형 단위로 구현된 대양 지도를 통해 항해의 모습이 구현되는 형태는 고전 롤플레잉 게임들이 가지고 있었던 캐릭터 위치 표현과 동일한 형태였다.

<대항해시대 1>의 항해 화면(좌), <울티마 5>의 항해 화면(우). 탑뷰 시점에서 간략화된 지도에 플레이어의 위치를 표기하는 방식은 고전 롤플레잉 게임과 유사한 형태를 가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롤플레잉 게임으로만 <대항해시대>를 부르는 것도 그리 정확한 표현은 아닌 듯 싶다. 캐릭터의 레벨업, 장비라고 볼 수 있는 함선과 물자의 업그레이드 등은 분명 롤플레잉 게임의 요소들이지만 게임 안에는 경영 시뮬레이션의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대항해시대>가 현실감있는 모험담이 되는 데에는 이 경영 시뮬레이션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해 봤을 <대항해시대 2>를 기준으로 예시를 들어 보자. 플레이어는 캐릭터 선택을 한 뒤 일련의 시나리오 흐름을 대화를 통해 지켜봤을 것이다. 처음에 가지고 있는 배는 작고 낡아서 도무지 큰 무역을 하거나 해적과 맞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2편의 진 주인공 격인 후안 페레로라면 포르투갈에서 시작하는데, 아마도 플레이어의 첫 고민은 교역소에서 ‘무슨 상품으로 무역을 해야 이문이 남을까?’ 이것일 것이다.

교역소에서의 화면은 또 아래 그림과 같이 일종의 표 형태로 구성된다. 탐험 모드와는 사뭇 다른 이 화면에서 플레이어들은 적지 않은 시간을 쓰곤 한다. 단지 한 항구에서의 계산만이 아니라, 각 항구별 시세를 생각해 보고 유지비와 시간까지 고려했을 때 이윤이 나는 루트가 어디인지를 생각하는 것도 게임의 일부다. 사실 이는 게임에 좀 익숙해지면 뻔해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2편에서의 아테네 – 이스탄불 루트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모든 모험과 전투에는 좋은 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한 부의 축적이 필수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대항해시대 1>의 튀니지 항구 교역소 화면. 이 항구에서 물건을 매입하는 가격을 보고 있다. 미술품을 가장 비싸게 쳐 주므로, 미술품과 카펫을 가져다 팔면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가까운 곳에서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항구는 1편 기준으로 ‘이스탄불’이다.

롤플레잉 요소와 경영시뮬레이션 요소가 이처럼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대항해시대>는 보기 드문 재미를 발산한다. 실제 지도, 실제 역사를 표방한 게임 환경 안에서 벌어지는 모험이 재정과 같은 현실적 문제와 엮이면서 플레이어를 16세기 지중해 어딘가에 갖다놓은 듯한 느낌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원양 항해를 나설 때 물과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면 항해 중 굶어 죽거나 선상 반란이 터지기도 하는 등의 실제감에 선수상을 비싼 걸로 교체하지 않으면 폭풍을 만나 표류하는 가상성이 결합되면서 내는 시너지는 마치 팩션 소설과 같은 현실에 기반한 상상력의 재미가 어떻게 터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효과를 발휘한다.

비슷한 사례가 되는 게임이 하나 더 있는데, 1989년의 <로스트 더치맨 마인>(Lost Dutchman Mine)이다. 한국에는 <금광을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게임은 서부개척시대의 골드러시라는 주제를 다뤘는데, <대항해시대>와 마찬가지로 실존했던 모험의 시대를 다루면서 세세하고 잡다한 일상의 번거로운 조건들을 함께 그려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금광을 찾아서> 또한 숨겨진 대금광을 찾아 나선 주인공의 모험을 그리지만, 그 모험을 위해 들어가는 장비 구입비,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겨내기 위한 식량 구입비용 등의 세세한 일상을 생략하지 않는다. 모험 자체의 쾌감은 실존했던 역사 속의 맥락으로도 충분히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로스트 더치맨 마인>의 게임 화면. 금광을 찾는 모험이지만 실제 게임에서는 굶주림과 목마름 해결에 상당한 시간을 쓰게 된다(사진의 아이콘들을 살펴보자). 그러나 이 시간을 씀으로써 모험은 비로소 모험이 된다는 점에서 <대항해시대>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롤플레잉 게임의 모험 요소가 경영시뮬레이션의 현실적 고려로 좀더 구체화되었지만, 모험의 경험이 플레이어에게 실질적 상(像)으로 맺히는 지점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개입한다. 실제 역사에 대한 플레이어의 지식이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대항해시대>를 처음 해보는 유저라면 당연히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는 것을 시도해 볼 것이다. 한편으로는 식량과 물을 가득 채우고 쿠바 제도로 항해를 떠나고 싶을 것이다. 이런 시도는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한 게임이기에 플레이어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조합해서 벌이는 모험이다.

게임 안이 아닌 밖의 이야기를 플레이어가 직접 가져와서 행위를 일으키게 되므로 플레이어는 모험에 보다 주체적인 입장이 되며, 완전한 가상의 이야기보다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재미 요소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사회과 부도를 펼쳐 놓고 항구를 찾는 행위는 단순히 게임의 힌트를 찾는 과정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재미가 플레이어의 지식배경과 얽히면서 또다른 재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모험을 떠나 본 지가 언제였는가, 친구여

모험이 가진 낭만성을 싫어하는 이는 없지만, 막상 현실에서 모험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말이 좋아 ‘젊은이여 도전하라!’고 하지, 빡빡하게 돌아가는 세상일을 뒤로 던지고 쉽사리 모험이라 부를 일을 찾아가는 것이 쉽다면 누가 평범하게 살려고 하겠는가. 실제 대항해시대 이후 시기에 쏟아져 나온 <걸리버 여행기>나 <보물섬> 같은 수많은 항해 모험 소설들의 인기는 모험없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 청량한 간접체험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수행했던 매체들이었다.

활자매체에 이은 영상매체, 그리고 인터랙티브 미디어인 게임에 이르면서 모험이라는 영원한 동경의 주제는 좀더 체험의 주체를 매체 수용자에 근접하도록 변화해 나가고 있다. 모든 것이 밝혀지는 세상에서 점점 좁아지는 모험의 영역이 아쉽다면 한번쯤 16세기 바다에 나가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꽤나 즐겁게, 꽤나 그럴듯하게 새로운 모험의 세계로 빠져들어볼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 일상이 팍팍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그러나 막상 실제로 모든 것을 던질 여건이 되지 못한다면 게임은 꽤나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팍팍한 일상의 당신은, 모험을 마지막으로 떠나 본 게 언제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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