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를 생각하며 지은 곡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항상 세월호를 생각하고 사는 이승환의 ‘무의식의 진심’이 담긴 가사였다. ‘우리 이제 집으로 가자. 그 추운 곳에 혼자 있지 마’ 우리에게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이 가사는 어디 먼, 시선도 닿지 않는 우주 공간에 홀로 떨어진 미아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먼 곳에 있음에도 집에 가자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인터스텔라처럼 아주 먼 곳이 가장 가까운 곳일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움을, 기다림을 그렇게 우주과학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킨 놀라운 시적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가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그 바다는 언제나 4월의 어둡고 찬 곳이 되고 말았다.

가수 이승환이 21일 오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삼성홀에서 열린 신곡 '10억 광년의 신호' 발표 쇼케이스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21일 발표된 이승환의 신곡 <10억 광년의 신호>를 듣고는 너무 놀랐다. 사실 이승환이라는 가수 아니 이승환이라는 깨어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대단한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노래는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다. 자연 그의 주옥같은 명곡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긴 세월을 활동한 그의 노래들을 챙겨듣기도 좀 겸연쩍은 일이라 그냥 이 가수에 대한 호감만 컸지 그의 노래는 모르는 채로 두었다.

그렇지만 신곡이라면 최소한 들어는 봐야 했다. 우선 제목부터가 다 죽어있는 시심을 자극했다. 또한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시그널>을 떠오르게 했다. 과거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그건 마치 빛이 10억년을 가야 겨우 다다를 수 있는 그 정도의 거리일까? 아니 그래도 닿지 못하는 것이 과거이며, 떠나간 사람이 머무는 곳일 것이다.

그런 불가능을 어쩌면 그보다 전혀 부족하지 않은 또 다른 불가능인 10억 광년의 거리라고 하니 어쩐지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착시효과일까 아니면 환상일까. 뭐가 됐든 하도 그리우면 생기는 현상이다. 너무 그리워서 걷다가 기절할 정도면 생길 수 있는 현상이다. 기절한 김에 꿈을 꾸고, 그 꿈에서 그를 만나면 영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현상이다. 신비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상이다.

10억 광년의 그 거리는 그리움의 거리이고, 기다림의 거리이다. 그만큼 그립고, 그만큼 기다릴 것이라는 마음의 깊이일 것이다. 얼마나 그리우면 10억 광년을 날아가 고요히 눈 감고 있는 ‘너’의 손을 잡고 ‘우리 이제 집으로 가자’할까. 꿈이라도 너무 먼 꿈인 10억 광년의 거리를 말이다.

이승환의 노래 ‘10억 광년의 신호’는 이처럼 거창하게 해석한 것조차도 어쩌면 부족할지 모르는 ‘무겁고 진중한 곡’이다.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이제는 단지 소모하는 것이 되어버린 21세기에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70년대에 만든 곡이 어딘가에 묻혀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툭 튀어나온 것만 같다.

그러나 아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이승환의 의식은 마음이나 그리움이라는 추상을 향했을지 몰라도 그의 ‘무의식의 진심’ 너무도 그리워서 그 말도 가까스로 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그 무의식은 아이들이 잠긴 그 바다를 바라봤을 것이다. 정말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승환의 말처럼 그렇게 믿는 것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고, 우리들의 몫이다. 또한 '듣는 이의 몫'이라며 한 발짝 물러서서 짐짓 딴청인 이승환의 그대로 은유적 긍정이다. 뒷북일지 모르겠지만 그는 시인이다.

너에게 보낸다. 가까스로. 무의식의 진심을. 너라는 우주로.
10억 광년을 날아 네게 닿기를. 단숨에 가로질러. 너라는 빛으로.

나는 너를 공전하던 별. 무던히도 차갑고 무심하게 널 밀어내며 돌던 별.
너는 엄마와 같은 우주. 무한한 중력으로 날 끌어안아 주었지.

네 마지막 신호. 불안하게 뒤섞여 끊어지던 파동의 끝자락.

나는 너를 공전하던 별. 무던히도 차갑고 무심하게 널 밀어내며 돌던 별.
너는 엄마와 같은 우주. 무한한 중력으로 날 끌어안아 주겠지.

우리 이제 집으로 가자. 그 추운 곳에 혼자 있지 마.
날 용서해. 널 사랑해. 우리 이제 집으로 가자.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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