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Did you kill my son?, <체인질링>

▲ 체인질링 영화 포스터ⓒ체인질링 홈페이지
영화 <체인질링>에서 싱글맘인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는 아홉 살 난 아들 월터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 아들은 없었다. 경찰에 전화를 했으나 24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현장조사를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아들이 실종된 지 5개월이 지나간다. 그리곤 경찰에게 아이가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아 달려갔지만 그는 아들이 아니었다. 크리스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자들과 경찰, 그리고 자신이 월터라고 우기는 아이.

그 아이는 자신의 아들보다 3~4인치나 작았으며 치아교열도 달랐고 교실 안에서 자신의 자리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크리스틴을 정신병자로 몰았고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린다. 중죄에 해당하는 범죄번호 ‘코드12’. 그곳에는 경찰에 맞섰다가 정신병원에 들어온 여성들이 있었다. 그렇게 피해자는 정신병원에 가해자는 사회를 활보하는 사회가 크리스틴이 살아간 LA였다.

크리스틴을 돕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다. 종교방송을 하고 있는 구스타브 브리그랩 목사(존 말코비치)였다. 그는 경찰횡포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며 함께하자고 한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사명감’이 아니라 아들을 찾는 것이라고만 답했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이미 ‘아들’을 찾겠다는 의지 자체만으로도 경찰과 맞서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용산 철거지역 참사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들은 왜 망루를 세웠나.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용산참사 이후 지금 그들은 공권력을 맞서 싸우고 있다. 그것은 원하던 원치 않던 단지 그렇게 된 것이다. 용산 지역 참사 현장에는 이러한 문구가 있다. “살려고 올라갔다가 죽어서 나왔다”는 가슴 아픈 문구.

영화 <체인질링>의 배경이 된 LA는 경찰횡포가 나날이 심해져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지난 여름 미국산 쇠고기 당시 한 여대생을 짓밟던 군홧발과 용산 참사 추모집회에 참석했던 한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 끌던 무지막지한 공권력. 큰 규모의 집회,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사안, 목격자들이 많았던 시간의 공권력이 그 정도라면 드러나지 않은 사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용산참사의 경우 경찰병력과 용역회사에서 합동으로 진압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것이 한국사회 신개발주의와도 맞닿아있고 그를 추진하는 정치권과는 또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이미 국민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체인질링>을 보면 크리스틴의 아들이 무참히 살해됐다는 또 다른 사건이 드러나고 시민들에 의해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면서 판세가 역전된다. 그러나 경찰청장은 담당 형사였던 존스 반장(제프리 도노반)에게 혼자 뒤집어 쓸 것을 명령한다. 그 뒤에는 시장 등 정치인들이 뒤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결국 재판에서는 존스 반장을 비롯한 경찰청장의 목까지 달아나고 시장은 차기 선거에서 출마를 포기한다. 이것이 원하던 원치 않던 크리스틴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 체인질링에서 재판장에서 증언하는 크리스틴ⓒ체인질링 홈페이지
현재 용산참사의 경우 정부의 행태를 살펴보자. 국민들은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뿐만 아니라 원세훈 국정원장 내정자와 오세훈 서울시장, 이명박 대통령까지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의 모습을 보라. 어떻게든 원세훈 국정원장 내정자까지 그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바심을 내고 있고 한나라당에서는 이를 정쟁화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들의 죄는 명확해진다. 김석기 경철청장 내정자의 경우 직접적으로 강제진압을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고, 원세훈 국정원장 내정자는 현 행정안전부 장관으로써 그 책임이 없다할 수 없다. 행정안전부는 나라살림의 전반적인 책임이 있는 곳이다. 깊게 들어가면 소방․경찰․공무원 등에 대한 관련 전반적인 책임이 있는 곳이다. 현재 참사가 발생한 용산지구는 2006년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일 때 재개발 지역으로 규정된 곳이어서 이명박 대통령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 서울시장 역시 그 관할지역이라는 데에서 책임이 있다. 책임질 사람은 많지만 누구하나 먼저 책임지겠다는 이가 없다.

<체인질링>은 ‘감동’ 실화라 했다. 용산지역 참사 역시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실화이다. <체인질링>의 사건이 1928년에 발생한 일이라면 우리는 현재 2009년에 공권력의 횡포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벼락맞아 뒈질 놈”. <체인질링>에서 크리스틴이 정신병원에서 만난 같은 신세의 여성에게 배운 욕이다. 영화에서는 때로는 그런 욕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사를 보자면 백 번이고 맞는 말이지 싶다.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묻는다. Did you kill my son?(크리스틴이 아들의 살인자로 지목된 자에게 절규하듯 묻는 말이다)

유감스러운 영화, <유감스러운 도시>

▲ 유감스러운 도시 영화 포스터ⓒ유감스러운 도시 홈페이지
같은 날 본 <유감스러운 도시>는 한 마디로 “정의는 살아있다”였다. 그리고 그 '정의'는 ‘경찰’이다. <체인질링>을 본 탓일까. 아니면 용산 참사 때문일까. 솔직하게 보는 내내 느껴지는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강력계 근성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 교통경찰인 장충동(정준호)는 외부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한 동료인 박종기(선우재덕)에 의해 특수수사팀에 합류, 양광섭(김상중)이 보스로 있는 조직에 잠입하는 특수 임부를 부여받는다. 한편 조직에서도 특수수사팀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이중대(정웅인)를 경찰로 잠입시킨다.

장충동과 이중대는 둘 다 승승장구하여 장충동은 양광섭의 신뢰를 받게 되고 이중대는 특수수사팀에 합류하게 된다. 이들의 갈등요인은 차세린(한고은) 경의로부터 시작된다. 조직에 의해 경찰로 분하지만 차세린을 사랑하게 된 이중대는 조직의 이중 감시를 받게 되고 차세린을 두고 천국장(박용기)을 처리할 것을 지시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직이 러시아 범죄조직의 거래가 있던 그날 차세린은 조직에 의해 박종기와 함께 차량 폭탄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 일로 개과천선(?)한 이중대는 이를 지시한 쌍칼(박상민)을 쫓게 되고, 특수수사팀에 의해 조직에 잠입한 장충동 역시 쌍칼을 뒤쫓는다. 결국 쌍칼은 양방의 총에 의해 역시 죽음을 당하고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장충동이 이중대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영화가 마무리된다. 2편을 예상하게 하는 장치이지만 과연 실현될지는 모를 일이다.

<유감스러운 도시>는 <두사부일체>,<투사부일체>의 주인공들이 총출동했지만 정준호-정웅인-정운택이 보여주는 정트리오의 웃음은 전작에 비해 격감됐고 김상중이라는 이외의 웃음 포인트도 이미 전작에서 끝났다. 이미 <투사부일체>에서 웃음을 선사한 김상중이란 캐릭터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다. <두사부일체>, <투사부일체>의 사학재단 비리에 맞섰던 계두식도 없었다. 오히려 조직과 경찰을 대비시킴으로써 ‘정의'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이중대의 분노 또한 감동적이지 않았다.

<두사부일체>나 <투사부일체>가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아무리 욕을 먹는 조폭이라도 경찰의 비리에 맞섰던 것에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도시>, '정의'가 곧 경찰에 의해 실현된다는 뻔하고 뻔한 스토리가 현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줄 것인지 모르겠다. <체인질링>에서는 “경찰은 LA의 수치다”라고 했다. 한국사회 역시 용산 참사의 과잉 강제진압을 통해 경찰의 위험성을 목격하는 중이다. <유감스러운 도시>는 그 '정의'의 현재적 모순을 말하지 않는다.

▲ 유감스러운 도시에서 정준호와 정운택이 함께한 코믹 장면ⓒ유감스러운 도시 홈페이지
그래도 굳이 <유감스러운 도시>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정준호의 인터뷰에서 찾아오고자 한다. 정준호는 한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10여 편이 넘게 영화를 하면서 빅시즌인 설 연휴에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단 한 편인 경우는 처음인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면서 “그만큼 제작 여건이 어려운 것 아니겠냐”라고 했다.

확 와 닿는 말이다. 한국영화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명절과 코미디 영화는 사실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가 많이 개봉했던 시기가 바로 명절인데 올해 설은 참 썰렁한 극장이다. 명절에 앞다퉈 영화 개봉을 했던 것 역시 어느 정도의 흥행을 담보한다는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 설에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유감스러운 도시> 단 한 편밖에 없다는 것이 곧 한국 영화의 위기인 것이다. 때문에 한국영화 마니아로서 <유감스러운 도시>는 반가우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유감스러운 도시>란 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은 그것이 다시 또 다른 한국 영화로의 제작으로 이어질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그래도 제목은 마음에 든다. 영화의 초반에 장충동은 “원치 않는 삶을 살 때, 유감스러운 세상이라고 한다”했다. 그것이 곧 유감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우리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도시>의 유감스러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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