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해임 등 사측의 중징계에 분노하며 17년 만에 제작 거부에 들어간 KBS 직원들은 22일 ‘대휴 투쟁’을 시작하는 등 ‘이병순 체제’ 동안 켜켜이 쌓여왔던 불만을 터뜨렸다.

절차를 무시한 이사회 진행, 경찰력 투입, 비판 프로그램 폐지 등 이병순 사장의 취임 과정과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비상식적인 일들로 인해 KBS 안팎으로부터 ‘땡이방송’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던 이들에게 KBS사원행동 중징계는 오히려 ‘KBS가 깨어나게 만든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 것일까.

▲ 22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KBS노동조합의 ‘부당징계 규탄 결의대회’가 열렸다 ⓒ곽상아
22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부당징계 규탄 결의대회’에서 KBS노동조합 조합원 700여명은 자유발언, 노래패 공연 등을 진행하며 경영진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마음껏 드러냈다. 민필규 KBS기자협회장은 “사측이 주말까지 아무런 답이 없을 경우 앵커들까지 책임지고 (방송에서) 빼겠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배밖으로 튀어나간 병순이 간 돌려달라’ ‘후배들 목 날리고 다리뻗고 잠이 오냐’ ‘개가 주인을 물어?’ ‘지못미 공영방송’ ‘33기 다 나왔다 BS 각오하라’ 등 손팻말도 눈에 띄었다.

▲ 김경래 전 <미디어포커스> 기자
김경래 전 <미디어포커스> 기자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중징계를 당한 성재호 기자, 김현석 기자, 양승동 PD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긴 힘들다. 다만 이병순 사장의 취임이 부당한지 부당하지 않은지를 떠나 ‘다른’ 생각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파면·해임을 한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참여율이 이렇게 높은 것”이라고 말했다.

현 정부와 수구세력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혔던 <미디어포커스>는 지난해 11월 가을개편에서 <미디어비평>으로 명칭이 바뀌며 사실상 폐지된 바 있다.

김 기자는 “공영방송의 공정성·객관성에 대한 철학이 합의되지 않을 정도로 (사원들과) 경영진의 생각은 다르다. 경영진은 모든 사안에서 기계적 균형성을 요구하고, 현 정치권에 미치는 파장을 먼저 고려한다. 이게 사측이 생각하는 공영방송”이라며 “철학이 다를 수는 있으나 경영진은 자신들의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무작정 꺾으려고만 한다”고 지적했다. 김 기자는 “여러 문제점들을 외부에서 지적받고 있는데 현재 KBS가 오해할 만한 여지를 굉장히 많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김 기자는 KBS 내부 분위기에 대해 “갑작스럽게 정연주 사장이 해임되고, 이병순 사장이 어처구니없는 절차에 의해 임명될 당시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정연주 지키기 아니냐’처럼 색안경을 낀 사람들을 설득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투쟁 동력이 약했고 결국 흐지부지 됐다. 노조 개혁에 있어서도 많은 KBS 구성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며 “이러한 실패와 좌절 때문에 냉소주의가 보도본부 내부에 굉장히 많이 쌓였었다. 이병순 사장 취임이 불과 6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굉장히 많이 지쳐있어 불만은 많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며 자신감도 굉장히 많이 떨어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 기자는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로 인해 불만이 켜켜이 쌓여왔고 속으로 끙끙 앓다가 이런 상황을 맞았다. 이번 일은 KBS가 깨어나는 데 중요한 계기”라며 “당장 조직문화를 개혁할 순 없지만 이병순 체제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이번 일은 굉장히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 향후 영향을 많이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 우현경 전 <생방송 시사투나잇> PD
<미디어포커스>와 마찬가지로 지난해 가을개편에서 <생방송 시사360>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며 사실상 폐지된 <생방송 시사투나잇>을 담당했던 우현경 PD는 (현 <6시 내고향>)는 “저널리스트로서 양심에 따라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이사회를 막았다고 해서 파면을 받는다면 진보·보수를 떠나서 방송국도 아니다”라며 “이것까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지 않느냐고 해서 지금 제작거부까지 하게 됐는데 이번 일이 KBS에서 일어났던 비정상적인 일들을 막아내는 촉매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 PD는 “개인적으로는 그분(이병순 사장)이 왜 그러시나 싶다. 상업방송과 달리 공영방송은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돼야 한다. 그것이 전체적으로 사회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현 경영진은 기계적 중립을 공영방송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나는 경영진 생각에 동의할 수 없고, 수신료를 내는 시청자들 역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 PD는 “시투 폐지와 이번 중징계 등 새 사장이 취임하고 난 후에 벌어진 일들은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통이 없는, 상명하달 식이라는 것이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라며 “단순히 ‘동료 구출하기’식 싸움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저널리스트로 입사했던 우리들은 이제 공영방송을 지키는 싸움을 해야 결국 승리할 수 있다. KBS를 국가기간방송으로 만들려는 저들의 의도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날 결의대회에 참석한 홍소연 아나운서(왼쪽)와 최원정 아나운서(오른쪽) ⓒ곽상아
최원정 아나운서는 연대발언에서 “이 자리에 PD, 기자 직종이 많이 모인 것 같은데 아나운서들도 22~23일 대휴를 냈다. 하지만 맡고 있는 방송의 출연을 거부하면 총파업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므로 출연은 하고 있다”며 “앞으로 노조가 투쟁의 수위를 높인다면 검은 리본을 달고 방송에 나오거나 방송에서 빠지는 것도 검토하는 등 얼마든지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KBS노동조합은 연휴를 앞둔 23일에도 투쟁을 이어나가기로 하고 구체적인 투쟁 방법을 논의하고 있다. KBS 기자협회와 KBS PD협회는 노조 일정과 별도로 23일 오전 11시30분부터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연대집회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 ⓒ곽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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