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제 협상 용어 가운데 ‘이렇게 늦은 순간(at this late stage)’이란 용어가 있다. 용산 학살은 어떠한가?

2.
도시는 사회의 공간적 구현이다. 무슨 말이냐면 도시는 한 사회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말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도시화율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1950년 21.4%였던 도시화율은 2000년 이후 줄곧 80%를 상회한다. 참고로 2005년 기준, 도시화율의 세계 평균은 48.7%이다. 도시화율이 높다는 것은 국민의 80% 이상이 도시에 살며, 농촌 지역에는 20% 미만이 산다는 얘기이다. 그 중에서 농사를 짓는 인구는 8%에 불과하다.

▲ 파이낸셜뉴스 1월20일자 '재태크'면

3.
현재 국내주거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80%를 상회한다. 채 50년도 안되어서 전 국토의 80% 이상을 도시화 시켜버리고, 그 주거양식의 80%를 아파트로 획일화한 사회적 변화를 우리는 ‘압축성장’과 ‘선진화’라고 하는, 얼핏 가치중립적으로 들리는 개념들로 묘사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4.
용산은 서울의 배꼽이었다. 지정학적 가운데란 말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중심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미군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용산주둔지’(Yongsan Garrison)라 부르는 용산 미군기지는 메인 포스트, 사우스 포스트, 캠프 코이너, 캠프 킴의 네 부분으로 나뉘며, 1980년대까지는 그 총 면적이 105만 평에 이르렀고, 현재는 대략 80만 평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울대공원의 3배, 어린이대공원의 6배, 여의도보다 넓고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비슷한 면적이라고 한다. 문자로는 이해되지 않는 규모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한국 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엄청난 규모의 불평등에 압살되어 용산은 낙후된 중심으로 존재했다.

5.
용산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2003년이었다. 그해 2월 주한미군은 용산 미군기지를 돌려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해 용산 세계일보사 터에 ‘시티파크’라는 이름의 초고층 주상복합주택 청약이 시작됐다. 물경, 7조4천억 이상 되는 돈이 몰려들었다. 정부는 대놓고, 서울시는 뒤에서 환호작약을 터트렸다. 용산 일대를 민간 건설 자본에게 파는 비용으로 막대한 기지 이전 비용을 마련할 셈이었다.

6.
그 뒤 용산 개발 계획은 거침이 없었다. 대우 트럼프 월드(37층, 2개동), 시티파크(43층, 5개동), 파크타워(40층, 6개동), 벽산메가트리움(33층, 4개동), GS자이(36층, 6개동), 월드마크타워(37층), 아크로타워(32층), CJ 나인파크(28~32층), 대우 이안(29~34층) 등이 들어섰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기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용산 지역 11개 주상복합건물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길이가 총 350m에 이른다고 한다.

▲ 용산구에서 청사 주변에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이 적힌 펼침막을 걸어 놓았다

7.
수직화, 그 유례없는 수직화의 도열은 한국사회가 접어들고 있는 경쟁 만능과 배제의 원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강변북로 일산 방향으로 차를 몰면 그 수직화의 흐름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분명이 목도할 수 있다. 한강대교에서 마포대교까지 용산 일대는 번듯함을 지나친 무시무시함이 지배하는 공간의 결정체가 되었다. 그 공간의 위용은 주변과의 관계성을 배제하고 배타적 공동체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천박한 발전이었다. 타워팰리스 이후 주상복합 건물은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물적 욕망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괴물이었다. 너무 과하다고? 그 즈음이었다. 용산구청 담벼락에 도단적 언어로 범벅된 추악함이 나붙었던 것은.

8.
처음엔 “세입자가 아무리 떼를 써도 구청은 도와 불 방법이 없습니다”고 붙었던 문구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로 바뀌었다. 구청은 국가는 그렇게 그들을 버렸다. 공적 공간에서 표출되던 그 사악한 분노와 나 역시 마주했었지만, 그냥 넘겼었다. 물론, 씁쓸했다. 하지만 올바름을 과장하는 것 같았고,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마땅한 방법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예정된 죽음들로 흘러갔다.

10.
우린 모두 용산으로 몰려갔었다. 도시로 아파트로 그리고 주상복합으로 욕망들이 고여 들었다. 수십조의 돈이 모였다 흩어졌다. 평당 2000만원에서 6000만원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세표의 등락은 곧 건설 경기의 지표가 되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분노하지 않았었다. 오랫동안 기능하지 못했던 낙후된 중심이 익숙한 중심으로 탈바꿈되리라는 ‘희망’의 청사진 앞에서 도시에 그리고 도시화율에 맞도록 훈련되어진 나의 욕망은 균열이 생기지 않았었다. 부동산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대를 실존적 존재로 살아내던 나는,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는 누군가들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분노도 사실 부끄럽다. ‘이렇게 늦은 순간(at this late stage)’까지도 나는 반성도 성찰도 각성도 뭣도 못했었다.

11.
끔찍하다. ‘과격시위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청와대 김은혜 부대변인의 공식 브리핑도, ‘주동자들은 외부의 시위 전문가’라는 조중동의 선전도 뭐라 댓거리를 하기도 참혹할 만큼 끔찍할 뿐이다. 이 시간에도 경제지들은 이번 학살로 재개발 일정에 차질이 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기사라고 만들고 있다. 어찌해야 할까. 화폐를 향한 욕망의 연대는 너무나 강고하고, 도덕을 말할 수밖에 없는 언어는 무력하다. 그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 이 글은 <직선들의 대한민국>(우석훈, 웅진지식하우스, 2008)과 <서울에서 서울을 찾는다>(홍성태, 궁리, 2004)를 참고하였습니다.
* 그 밖의 통계나 자료들은 <한겨레21>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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