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늘 조중동 신문을 펼치는 순간 ‘화’가 났다. 왜 이렇게 다뤘는지, 정말 이렇게 밖에 다룰 수가 없었던 것인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20일 용산 참사 추모 촛불집회에는 수많은 취재진들이 있었다. 그 많은 취재 카메라, 수첩들 중에 조중동 기자들도 있었을 터인데 21면 조중동 신문지면은 왜 이렇게 밖에 나오지 않았을까. 20일 추모현장 촛불 집회 취재기자들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20일 추모행렬 취재기자들은 어느때보다 빨랐다

20일 오전 용산구 한강로2가 재개발지역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참사가 발생한 건물 앞에는 빈소가 차려졌고 끝이 보이지도 않는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사람들의 한 손에는 촛불과 다른 한 손에는 국화를 들고 있었다. 용산에는 그렇게 2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요구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취재진들이 보였다. 그 취재진들의 수가 이번 사건이 정말 큰 문제임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는 듯 했다.

▲ 20일 용산역에서 진행된 추모 촛불집회를 취재하는 기자들

8시30분경 촛불집회가 마무리되고 ‘살인정권 규탄한다’, ‘청와대로 가자’라는 참가자들의 요구가 줄을 이었고, 앞으로 행진하려는 참가자들과 이를 막아선 전경들 사이에 대치가 시작됐다. 서울시내 한 복판이어서인지, 취재진들 때문인지, 아니면 참사에 의한 자기검열 때문인지 경찰병력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7시에 시작된 추모 촛불집회가 2시간가량 이어지자 저녁 9시를 넘겨 경찰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살수를 시작했다. 살수의 횟수는 많지 않았지만 ‘살수’가 대형 참사 발생의 원인으로 대두된 상황에서 추모행렬에 살수한다는 자체에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취재진의 카메라는 살수차를 향해 움직였다. 다른 곳을 향하던 카메라가 살수차를 향해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추모행렬은 용산을 떠나 서울역-명동으로 이동했고, 취재기자들 역시 발빠르게 그들을 좇아갔다.

추모행렬이 다시 모인 곳은 명동성당.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집회를 열기도 하고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집회 참가자들은 시신이 안치돼 있는 순천향대학병원으로 이동하기도 했고 다시 분향소가 차려진 용산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취재기자들은 대체로 명동에 남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오랜 취재경험 끝에 알 수 있었던 것일까? 남은 사람들은 다시 행진을 지속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으나 추모행렬을 막아선 것은 경찰병력이었다.

이를 넘어서고자 참가자들은 보도블록을 깨기 시작했고 명동성당 길목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긴장감이 흐른 것은 취재기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들은 가지고 온 안전모를 착용했고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섰다. 카메라는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를 오갔고 취재수첩에는 당시 시간을 나타내주는 ‘11:00’라는 표시와 함께 당시 상황들이 빼곡히 적혔다. 순간 집회참가자들은 경찰특공대에 의해 철거민들이 무참히 살해된 울분을 참을 수 없었는지 깨어놓은 돌을 경찰들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이 외친 구호는 “살인경찰 물러가라”였다.

▲ 20일 용산역에 모인 추모행렬 참가자를 인터뷰하는 기자들

대치중이던 전투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전경들 사이에서는 날아간 돌을 주어 다시 시위대에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경찰은 앞쪽에 놓여있던 노점수레를 옆으로 밀어내며 공격할 준비를 시작했고 참가자들을 향해 한 걸음 한걸음, 그러다 전속력을 행해 돌진해 들어왔다. 집회 참가자들은 명동성당 들머리까지 전경들에 의해 밀려올라왔고 그 사이 전경들의 무차별한 군홧발과 곤봉세례에 수많은 참가자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전경의 진압을 촬영하던 시민기자도 취재하다 돌에 맞아 누워 치료를 받고 있었다.

명동성당 부근에서는 ‘의료진’을 찾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얼마 후 도착한 119에 의해 응급실로 실려 갔다. 취재기자들은 다시 다친 집회 참가자들에게 향했다. 상황이 어떠했는지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를 기록하는 장면들이 포착됐다. 당시 전경들에 무참히 밟힌 4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눈에 띄었다. 그 남성은 참가자들의 부축을 받고 치료를 위해 백병원으로 향했고, 그를 따라간 나는 그곳에서 일곱 명의 부상자들을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대다수 눈과 이마, 머리 등이 찢겨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온몸을 무장한 전경들을 상대하기엔 이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경찰 관계자는 명동성당을 둘러싼 병력은 6대 중대, 6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취재진들은 목격자가 되기도 한다. 집회 참가자들의 외침과 상황들이 기자들의 수첩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기 때문이다. 20일 추모현장은 그렇게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있었고 그 어떤 기자들도 집회 참가자들이 모두 흩어지기 전까지 현장을 뜨지 못했다.

▲ 20일 용산역에서 진행된 추모 촛불집회를 취재하는 기자들

조중동 취재기자들은 놀면서 취재하나?

조선일보는 용산 철거지역 참사에 대해 “철거민 참사로 2월 ‘인사청문회 전쟁’ 예고”, “여권 ‘어쩌나…’”라는 기사를 통해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이 미칠 영향에 대해 전망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전국의 재개발 사업에 개입·압력-화염방사기·사제총 사용 논란도”라는 기사에서 이번 사건의 배후에 전국철거민연합회가 있음을 암시하도록 배치했다. 또한 “용산개발 노른자위 땅…세입자 127명 이주 거부”에서도 “특히 상가 권리금을 법정 보상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점포 세입자들이 장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착공 전에 구역 안에 임시 매장 등 대체상가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해왔다”며 은연중에 참사의 책임을 철거민에게 넘기는 기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역시 “경찰, 연행자 28명 중 세입자는 7명…나머지는 원정 시위대”라는 기사를 통해 “전철연 소속 회원들이 화염병 투척 등 극렬 시위를 사실상 주도한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전철연의 과격 성향은 과거 시위 현장에서 여러 차례 나타났다”고 덧붙여 중앙일보 역시 배후세력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사설에서는 “민주당은 ‘공안통치가 빚어낸 참극’이라며 정치 쟁점화할 태세다”라며 “그러나 이번 참사가 정치공세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고인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본다”라고 덧붙였다.

동아일보는 “경찰특공대 진압작전 투입 김석기 내정자가 최종승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 “여권 내 김석기 경질론이 대두되고 있으며 이 사건이 쇄신 드라이브에 ‘암초’로 등장”하고 있다고도 했다. 사설 “용산 참사, 책임 소재 가리되 정쟁화는 안된다”에서도 “정부는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며 “철저한 수사를 통해 인화물질 반입 주동자와 불을 붙인 방화범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전철연이 이번 과격 시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밝혀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결론부분에서는 “정부가 1.19 개각으로 집권 2년차의 새 출발을 준비하는 시점에 이런 불행한 일이 터졌다”면서 “이 사고를 구실로 사회갈등을 부추기거나 제2의 촛불로 확산시키려는 세력이 있다면 의도가 불순하다”고 못박았다.

▲ 명동성당에 모인 집회 참가자들을 취재하는 기자

조선·중앙·동아일보가 주목한 것은 3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야당이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정치 쟁점화는 안 된다는 것, 둘째 “배후세력에 전철연이 있다”면서 이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 셋째, “정부가 집권 2년차 새 출발”하는데 이번 사건이 확산되면 안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 신문은 단지 이 사건으로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 안에 그 어떤 ‘애도’, ‘슬픔’, ‘울분’은 없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라도 조선·중앙·동아일보가 이야기하는 ‘진상규명’은 정작 또다른 ‘화’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조선·중앙·동아일보 중에서 20일 용산 참사 추모 촛불집회를 다룬 곳은 ‘중앙일보’밖에 없었다. 중앙일보는 지면에서 “1000여명의 시민은 촛불을 들고 ‘경찰이 무리하게 농성자들을 진압했다’는 취지의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은 전철연이 불탄 건물 앞에 마련한 임시분향소에 국화를 헌화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한쪽 차로를 가득 메우고 두 시간가량 경찰과 대치했다. 일부 시민들은 보도블록을 깨 경찰에 던졌다. 경찰은 살수가 두 대를 동원해 물대포로 해산을 시도했으나 500여명의 집회 참가자들은 명동으로 옮겨 보도블록을 깨서 경찰에 던지는 등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고 전했다.

이게 끝이었다. 그날 있었던 수많은 메시지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현장에서 아무리 많은 기자들이 치열하게 취재를 했더라도 지면에 실리지 않으면 그만이다. (조중동) 기자의 운명이란….

▲ 명동성당에 모인 집회 참가자들을 취재하는 기자

▲ 취재하다 다친 시민기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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