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조에는 각 나라에서 온 다양한 이주노동자들이 비자유무, 성별, 업종, 나이 등에 상관없이 가입되어 있다. 대개는 상담을 통해 이주노조에 가입을 하게 되는데 같이 밥이라도 한 그릇 먹으면서 한국에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한편의 인간극장을 찍어도 될 만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네팔에서 온 마하라씨는 지난 3년간 노조 활동에 꾸준히 참여했던 모범조합원이다. 그래서 마하라씨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대신 풀어내보고자 한다.

네팔에서 고등학교 과학선생님이었던 마하라씨는 우리나라로 치면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같은 노조에 소속된 열성조합원이었다. 여고에서 과학을 가르치면서 네팔의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아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마하라씨는 어느 순간부터 교장에게 속된 말로 찍히게 되었다. 교장은 직간접적으로 마하라씨에게 노조를 탈퇴할 것을 종용했지만 마하라씨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버텼다. 결국 교장이 마하라씨에게 수업을 전혀 배정하지 않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고 마하라씨는 참다 못해 한국어능력시험을 보고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마하라씨는 한국에서 날라온 근로계약서 상에 업종이 fishing(어업)으로 작성된 것을 보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낚시일을 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둬야 할 사실은 네팔은 위로는 중국 아래로는 인도가 위치해 있고 전혀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마하라씨는 바다에서 배를 타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 마하라씨는 생전 처음 보는 바다를 보고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배에 타야만 했다. 배를 타자마자 시작된 엄청난 욕설과 밤낮없는 고된 노동, 거기에 뱃멀미까지 겹치니 마하라씨는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내게 말해주었다. “아, 정말 그때는 지옥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마하라씨는 배가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도망을 쳤다고 한다. 현행 고용허가제 법률상 사업장을 5일 이상 무단결근하거나 노동자가 행방불명이 되었을 경우 사업주가 사업장 이탈 신고를 하게끔 되어 있고 이것을 한 달 이내에 취소하지 못할 경우 그대로 비자가 박탈된다. 마하라씨는 다시는 배를 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살면서 전국 곳곳을 떠돌며 일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친구를 통해 이주노동조합을 알게 되었고 2013년 봄에 노조에 가입하게 된다.

아직도 마하라씨를 처음 만났을 때가 눈에 선하기만 하다. 중절모자를 쓴 깔끔한 양복차림의 네팔 이주노동자가 웃으면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주었다. 동영상이 담긴 CD였는데 컴퓨터에 틀어보니 네팔에 있는 평화운동가의 연설이 재생되었다. 문제는 영어도 아닌 네팔어로 연설을 하는 바람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가 참 좋은 내용인 것 같다면서 다음에 보겠다고 대충 둘러댄 기억이 난다.

그뒤로 마하라씨는 노조 회의, 집회, 교육 등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곧잘 이야기했다. 당시 2013년만 하더라도 아직 이주노동조합이 합법화되기 전이었고 이주노조의 활동방향, 전망 등에 대해서 토론하는 회의자리에서 마하라씨는 온갖 의견을 제출했다.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집회를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하자”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서 여러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등 이주노조를 보다 발전시키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한 동지였다. 마하라씨는 미등록 신분이었기 때문에 한 사업장에 계속 머물러 있기 보다는 전국의 사업장을 옮겨 다니며 일을 하곤 했는데 왕복 열시간이 넘는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주노조 회의에 참여하러 달려왔다. 이런 동지를 또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한달쯤 전, 사무실에 불쑥 찾아온 마하라씨는 노조 사무실에 맡겨놓은 가방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내가 “어디 멀리 가냐”고 물어보니 “그냥 뭘 좀 찾으러 왔다”면서 웃었다.그리고는 오는 김에 선물로 샀다면서 반팔 티셔츠를 깜짝 선물해주었다. 다시 전라도에 일을 하러 간다며 웃으면서 헤어진 마하라씨를 다시 만난 건 4월 9일 시청광장이었다. 세월호 참사 2주기 서울지역 대행진 마무리집회에서 마하라씨는 늘 쓰고 다니던 중절모자 대신 흰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평소와 좀 다른 모습에 나는 늘 그렇듯 “이번에는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니 “이제 네팔로 돌아간다”고 했다.

▲우다야 위원장님과 마하라 동지와 나의 사진

갑작스런 마하라씨의 귀국소식에 나는 흠칫 놀랐지만 지난 몇 년 간의 이주노조 활동에서 느낀 게 있다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주노동자에게는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했다.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 뚝딱 먹으면서 마하라씨가 한국에 오기전 교사로 일할 때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한국에 올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마하라씨는 또 활짝 웃으면서 “이제 네팔에 가서 딸 결혼도 시키고 다시 교사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저녁을 먹은 우리는 같이 광화문 광장에 가서 <세월호 참사 2주기 약속콘서트>를 관람했다.

헤어지는 마하라씨에게 “다시 언제 보냐”고 물으니 “네팔에 놀러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며 늘 그렇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네팔 고향에 도착해서 몇 년만에 만난 가족들과 맛있는 식사도 하고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있을 것이다. 마하라씨 뿐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한글교실 때 만난 이주노동자 학생들, 이주노조에 처음 오자마자 입국거부를 당해 끝내 만나지 못한 미쉘 전 위원장님을 포함하여 이주노조를 거쳐간 많은 이주동지들이 한국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고국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작년 이주노조 합법화 농성 투쟁 승리보고대회에서 이주노조를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다 강제출국된 이주노조 전 간부들의 이름을 한명씩 외친 적이 있다. 합법화가 되는 그 순간을 가장 기다렸을 동지들이었기에 그 목소리가 멀리 멀리 퍼져서 그들에게 닿기라도 바라는 마음에 한명 한명 더욱 크게 외쳤다. 그 이후로 언젠가는 그들 모두가 한자리에 다시 모여서 술 한잔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수 있기를 바래본다. 언젠가 그 날에 마하라씨를 다시 만난다면 한국에서 산 멋진 모자를 하나 선물해주고 싶다.

한동안 노래를 소개하지 않았는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 속에 이주노조를 품고 사는 이주동지들을 떠올릴 수 있는 노래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윤도현&이소은이 듀엣으로 불렀고 애니메이션 영화 <오세암>의 OST이기도 했던 <마음을 다해 부르면>은 마침 4.16 세월호 2주기를 맞이해서 들어봐도 좋을 것 같다. 마음을 다해 부르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들만이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소중한 시간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 믿는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시간이 흘러서 다시 읽었을 때 마하라씨의 따뜻한 웃음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래본다.


박진우_ 2012년부터 이주노동조합의 상근자로 일을 하고 있다. 어릴때부터 대안학교 선생님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고 있어서 언젠가는 이주아동 대안학교 선생님을 하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일을 한지 3년이 되어가지만 외국어를 못해서 무조건 한국어로만 상담을 하고 있다. 이주노조가 반드시 합법화되서 한국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튼튼한 조직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개인적으로 몸무게가 계속 늘어서 movement(운동)가 아닌 exercise(운동)를 심각히 고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