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몰락했다. 유일하게 원내 진보정당인 정의당의 의석은 19대의 5석에서 한 석이 늘어 6석(=지역구 2석+비례대표 4석)이 됐으나, 애초 목표였던 ‘10% 이상의 정당지지율’과 ‘두 자릿수 의석’을 얻는 데 실패했다. 원내정당만으로 보면, 19대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이 13석(=지역구 7석+비례대표 6석)을 얻은 19대, 민주노동당이 10석(=지역구 2석+비례대표 8석)을 얻은 17대에 비해 크게 못 미치는 성과다. 정의당은 스스로 ‘야권연대’ 프레임에 갇혀 지지율을 끌어올리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외 진보정당의 경우, 단 한 명도 원내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 정당들은 정당투표를 통해 비례대표를 한 석이라도 확보하는 것이 이번 총선의 목표였다. 그러나 정당지지율 3% 이상으로 비례대표 의석을 얻은 정당 또한 원내정당 네 곳뿐이다. 원내정당들의 지지율 총합은 93% 가량으로 이들이 비례대표 47석을 나눠가졌다. 정당별로 보면, 새누리당은 33.50%로 17석,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각각 25.54%와 26.74%로 13석씩, 정의당은 7.23%로 4석이다. 반면 원외진보정당은 아예 국회에 진입조차 못했다. 녹색당은 0.76%, 민중연합당은 0.61%, 노동당은 0.38%를 얻는 데 그쳤다.

▲20대 총선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 결과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색깔 박스는 미디어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진보정당의 정책과 인물을 배제하고 선거판을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위주로 보도한 언론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13일 밤 JTBC와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언론 환경이 가장 어려움이었다”며 “아무리 좋은 정책이 있고 잘 하는 후보가 있더라도 국민이 알아야 찍는다. 다른 세 당 만큼 공정하게 보도가 됐다면 두 배 이상의 성과를 만들지 않았겠나. 아쉬움을 크게 갖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은 원외진보정당을 아예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

소위 ‘야권분열’로 치러진 선거의 구도도 진보정당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야권 지지층에게 ‘교차투표’를 호소했다. “3번을 지지하더라도 새누리당과 맞붙는 지역구에서는 2번에게 힘을 실어 달라”는 게 제1야당의 선거전략이었다. 정권심판론과 야당심판론이 동시에 작용한 이번 선거에서 수도권 야당 지지층의 표는 ‘이길 만한 야권 후보’에 쏠렸다. 제1야당의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다. 국민의당이 제3당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이 언론과 선거구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승자독식의 소선구제에서 진보정당이 의석을 획득하는 방법은 정치공학적 야권연대 정도이고, 정의당은 총선을 앞두고 이른바 ‘진보결집’을 통해 덩치를 키웠지만 야권연대에 실패했다. ‘정의당이 진보정당의 원칙을 저버리고 우경화됐다’는 빤한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의당은 국회에서 보수정당들을 견제할 수 있고, 진보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큰 진보정당이다. 그러나 ‘한자리 수 지지율의 진보정당’은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에게 연대를 고려할 만한 ‘쓸모 있는 파트너’가 되지 못했다. 정의당은 과거 반(反)한나라당 전선에 섰던 일부 진보세력의 오판을 반복했다.

원외 진보정당들은 아예 존재감이 없었다. 녹색당과 노동당은 자신의 특기를 잘 살린 공약을 내놨고 대구와 울산 등 일부 선거구에서 20~30%의 지지율을 얻었지만, 당 차원에서 대중적인 ‘이슈’를 만들지 못한 것은 물론 대중적인 ‘구호’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구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대거 합류한 민중연합당은 광주와 전남에서 2% 이상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하고 경북 구미에서는 새누리당 후보와 붙어 30%의 지지율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중의 ‘신뢰’를 다시 얻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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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정당들이 지배하는 정치 질서와 선거제도, 언론의 배제, 운동권 혐오 정서, 상대후보의 색깔론을 탓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진보정당은 ‘실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제도정치에서 유의미한 세력이 되려면 대중에게 소구력이 있어야 한다. ‘진보 빅텐트’를 만들든, 독자 행보를 하든지 진보정당이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제도정치에서는 의미가 없다. 원내 진입에 실패한 진보정당들은 이번에야말로 혁신을 고민해야 한다.

선거는 끝났지만 정치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 총선은 그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일부일 뿐이다. 그간 진보정당 정치의 성과가 없지 않다. 이번 총선에서 최저임금 1만원, 동물복지법 같은 진보정당의 공약은 거대정당을 견인했다. 녹색당은 밀양 주민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냈다. 노동당은 청년노동의 문제와 지역의 소상공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제 진보정당은 제도정치 만능론과 제도정치 회의론을 동시에 경계하면서 혁신해야 한다. 미디어 전략도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진보정당이 제도정치에서 살아남는 길은 지금보다 더 밀도 있게 노동자운동, 청년운동, 환경운동과 결합하면서 지역과 현장에서부터 정치의 공간을 여는 것뿐이다. 노동자, 청년, 성소수자, 청소년의 삶이 ‘진보’하는 데 기여해야 진보정당에 미래가 있다. 보수정당이 투표의 주체를 구성한다면 진보정당은 정치의 주체를 발명해야 한다. 진보정당들은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역과 현장에서 운동을 재개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정의당은 과반을 차지한 야3당이 공감대를 갖고 있는 문제인 선거제도 개혁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진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가 진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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