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그리의 제국론이 국내에서도 꽤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말하는 제국은 근대적 민족/국가의 영토적 확장으로서의 제국주의와 구분된다. 탈근대적 초국가 체제로 등장한 게 제국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기초하자면, 미국 제국주의라는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제국이라는 뜻은 더욱 아니며, 제국이 미국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성립되지 않는다. 제국에는 중심이 없고, 그래서 미국은 제국의 중심도 아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인가?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애매하게 답한다. “제국의 등장과 지속 성장에 일차적 역할을 한 게 맞고,” 그런 점에서 ‘제국’은 좀 문제가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

당연하게 네그리 주장에 대한 많은 이론적 논란, 지적 반론이 있었다. 제국론에 동의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다. ‘미국의 제국주의’라고 할지 ‘제국의 미국’이라고 부를지 상관없이, 미국은 21세기 국제정치와 전지구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체제에서 여전히 핵심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요컨대 미국은 정치·경제적 지배 현실이다. 많은 학자들이 미국의 몰락 혹은 미국 패권의 추락을 예고했고, 실제 최근의 금융 위기와 공황의 징조가 이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신자유주의의 희망찬 언어도 나온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런 현실이 세계자본주의 권력국가이자 인종·계급의 변증법적 모순사회이기도 한 미국의 중대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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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정황 속에서 오바마가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국제사회로부터 비난받던 관타나모수용소 폐지를 약속했고, 김정일과도 조건없이 만나겠다던 오바마다. NAFTA 등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도 노동, 환경 측면에서의 재협상 필요성을 내비쳤다. 이러한 점에서 부시의 일방적, 무력적, 폭력적 외교노선과 확실히 차이가 나는 듯 했다. 한반도의 위기, 한국사회의 위험 극복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처럼 보였다. 국내 진보진영이 그의 당선에 꽤 기대감을 보였던 이유다. 그러나 관타나모 폐지 약속은 벌써 불분명해졌고, 취임 직전에 있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부시 외교의 마지막 선물로써 오바마를 악몽에 빠뜨렸다. 동북아에도 평화와 전혀 어긋난 긴장의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과연 오바마는 급변하는 세계를 평등·평화·평온이라는 공통이익의 길로 끌어내는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해 낼 수 있을까? 제국주의의 미국, 제국의 미국과 다른 변모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변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20대 신자유주의 뉴-키즈들을 변화주체로 끌어냈다. 그래서 지독한 인종차별의 벽을 돌파했다. 그런 그가 미국사회의 구조화된, 80년대 이후의 광폭한 신자유주의 통치에 의해 심화된 인종·계급의 모순구조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변화’를 캠페인 구호가 아닌, 미국인과 세계민의 삶에 공히 유리한 실제 현실로 실현시킬 수 있을까? 요컨대 내외부적 이중위기의 상황에서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오바마의 정치학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선거 전 독일 <슈피겔>과 가진 좌담에서 촘스키는 ‘오바마 브랜드’에 큰 기대를 갖지 말라고 단언했다. 권력에 대한 불신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에 비춰볼 때, 새삼 놀라운 반응도 아니다. 오바마 당선 후의 다른 대담에서도 그는 ‘백악관의 흑인 가족’이 민주주의를 위해, 권력에 반해 어떤 행동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극히 냉소적이다. 오바마 당선이 얼마나 ‘역사적’인지 래디컬하게 시비한다. 이라크전쟁을 적극 지지했고 빈민대중들의 구제에 무관심했던 바이든 상원의원의 부대통령 지명을 변화의 행동, 행동의 변화와 구별되는 ‘레토릭으로서 변화’의 명백한 증거로 꼽는다. 촘스키에 따르면, 당선 직후 오바마가 택한 백악관과 행정부 관료들의 면면도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배신을 입증한다.

미국 진보진영의 오바마 평가는 좀더 복잡하다. 한편에서는 촘스키보다도 더 비관적이다. 특히 행정부 경제팀을 두고, ‘과거와 전혀 다를 게 없다(Same Old Same Old)’고 비난한다. 주류정치의 중도우파에 속하는, 미국과 세계 경제를 대공황 이후의 최대위기로 이끈 신자유주의·탈규제주의 정책 당사자들이라는 것이다. 세금감면을 기조로 한 부시 행정부에서 정통적 경제 정책으로 전환을 시도하겠지만, ‘오바마노믹스’는 월가와 대기업의 이해관계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분석이다. 선거 당시 공화당으로부터 ‘리버럴 좌파’ 정치가라는 낙인을 받은 오바마에 대한 냉정한 평가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실상을 명확히 인식하면, 그가 미국과 국제 사회에서 보여줄 수 있는 ‘변화’의 한계도 명백해진다.

이와 달리 오바마에 대한 희망의 기대감을 표시하는 쪽도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매체 <네이션>의 워싱턴 특파원인 존 니콜스는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직후에 한 말에 주목한다. “나는 확실하게 진보적인 사람이다(I am somebody who is no doubt progressive).” “나는 나를 진보적이게 만드는 많은 것들에 믿음을 둔다(I believe in a whole lot of things that make me progressive).” 그는 오바마 당선을 민주당의 승리가 아닌, 진보진영의 성과로 적극 매김한다. 오바마가 대통령으로서 제대로 해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게 크게 무리해 보이지 않는다면서, 그는 오바마가 잘하도록 끊임없이 ‘지지하고 압박(push)’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 내린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다. 노무현 정권 때 진보진영에서 내놓았던 이야기 구조와 닮아 있다. 그때 한쪽에서는 노 정권의 명백한 구조적 한계를 지적했고, 또 그 한계가 한미자유무역협정 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다른 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지닌 개혁의 가능성과 사회문화적 변화의 의미에 대해 인색하지 말자고 고집했다. 한쪽에서는 그를 버렸고, 다른 쪽에서는 카드를 지키려고 했다. 분명 노 정권은 신자유주의, 탈규제주의 이념을 택함으로써 좌파의 가치에서 이탈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과거 정권이나 현 정권과 비교해,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리버럴 개혁·진보의 모습을 보인 것도 맞다. 노 대통령 스스로 자신을 ‘신자유주의 좌파정권’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던가?

오바마 정권도 노 정권과 흡사한 이중성을 갖고 출범한다. 야뉴스 정권의 탄생이며, 그 이중적 속성은 미국 내부 정책뿐만 아니라 국제 외교 정책에서 고스란히 재현될 것이다. 온건과 강경, 대화와 지배의 모순 양상들이 전개될 개연성이 크다. 인·민을 고려한다면서 동시에 자본을 배려할 수밖에 없고, 대화를 강조하는 한편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정신분열증적 정권으로 존재할 것이다.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자임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익’을 위배하거나 더군다나 전쟁이라는 카드를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인류적 범죄행위에 대한 지금과 같은 침묵 혹은 격에 맞지 않는 소극적 발언은 오바마 정권이 지닌 제한된 잠재성보다 훨씬 더 큰 구조적 한계성을 확인시켜준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압력, 군산복합체의 회유, 신보수 기독교 근본주의의 봉쇄, 이스라엘 유태인의 로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불안한 민주당 정권이다. 금융 자본주의의 위기, 신자유주의 체제의 위기, 공황의 위기와 함께 시작하는 정권이다. 위기의 제국(주의), 위기의 미국에 조응한 위기의 정권의 시작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보면, 진보정치의 새로운 구상, 사회운동의 새로운 구축, 포스트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탐색 움직임과 연동해서 출발하는 가능성의 시대적 정권이기도 하다. 물론 오바마 정권을 책임지는 것은 미국 시민, 진보진영의 몫이다. 그렇지만 미국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기에, 제국(주의)과 그 속 우리의 삶과 연루되어 있기에, 고민은 한국의 진보진영으로도 전이된다. 특히 지금의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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