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살기 위해서 죽여.”

하얀 눈밭을 맨발로 걸어다니는 한 소녀가 붉은 피가 묻은 입으로 또박또박 말을 한다. 비릿한 피냄새가 극장 안을 감싸는 듯하다.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역설. 영화 <렛미인>의 ‘이엘리’를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진다. 나의 존재가 타인의 존재를 파괴해야 하는 숙명. 하지만 사람들은 뱀파이어에게 슬픔의 눈물 대신 악마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를 입힌다. 그래서 신의 증표인 십자가를 두려워하고 마치 대역죄라도 지은 듯 밝은 햇볕 아래에 서면 눈부셔 재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도 뱀파이어처럼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말해 자신이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이나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해치는 거의 유일한 종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마치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처럼 말이다.

▲ 이스라엘 남부의 한 언덕에서 가자지구의 폭격 장면을 보며 웃고 있는 이스라엘인들.
절망.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끔찍한 학살에서 느끼는 단 하나의 감정이다. 이 세상에서 쇳덩어리들, 예컨대 총이니 미사일이니 하는 것들에 죽어도 괜찮은 생명은 단 하나도 없다.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거나 인류에 대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쇳덩이에 빼앗길 정도로 무디고 차가운 목숨붙이란 없다. 아마 지옥이 있다면 바로 가자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혹한 학살의 풍경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선택받은 민족이라 생각하는 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악마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지옥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 인류는 이만큼 끔찍한 일들을 목격해왔다.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한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프리모 레비. 나는 그를 차가운 감옥 안에서 만났다. 감옥이 사람 살 만한 곳은 아니지만, 프리모 레비가 살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할 수 있으랴. 유대계 이탈리아인이었던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다. 절멸수용소. ‘절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시무시한 공포. 아마도 서구인들은 그 이상의 지옥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아우슈비츠처럼 참혹한 지옥은 세계 곳곳에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의 토착민들은 말 그대로의 지옥을 살아냈다.)

▲ 프리모 레비
인간임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암송하며 시대의 증인으로 생환한 프리모 레비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모든 악은 나치에게 돌리고 지옥에서도 인간으로 귀환해온 인간 의지에서 미래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잔혹한 폭력을 소설을 통해서 고발했던 프리모 레비는 1987년 돌연 자살을 한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레비를 찾아서>를 쓴 서경식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지옥에서도 삶을 긍정했던 낙관주의자 프리모 레비의 자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레비는 이스라엘 국가가 가족이 살해되고 고향이 파괴당한 유대인 공동체, 특히 아우슈비츠의 지옥을 함께 살아 나온 그의 동료들에게 소중한 ‘피난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군사거점 공격을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하게 되자 레비는 ‘이스라엘군의 레바논에서의 철수 요구서’에 서명했다. “우리 모두가 이웃의 장소를 빼앗고 그 대신에 살고 있다”고 근원적인 물음을 스스로 던져온 프리모 레비에게 나치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가는 이스라엘은 견디기 힘든 수치였을 것이며,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기 위해 조용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서경식의 이야기(<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2006, 창비)는 가슴 아픈 동감을 자아낸다.

레비가 자살로서 경고했던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다. 가장 끔찍한 지옥을 겪었던 유대인들의 나라 이스라엘은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의 상처와도 같은 지옥의 기억을 현실세계에 펼쳐내고 있다. 수치를 아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견디지 못할 상황들이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번 가지지구에 대한 공격으로 1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었고, 그중 300명이 어린이고, 그동안의 이스라엘의 점령과 추방으로 550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다. 그 숫자는 충분히 비극적이고, 백기를 든 피난민들에게 총질을 가하고 유엔 구호 트럭조차 폭파시키는 이스라엘의 행동도 너무나 절망적이다. 스포츠 경기구경 하듯 도시락을 싸들고 언덕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폭격을 구경한다는 이스라엘 국민들에 대한 보도는 프리모 레비의 소설 제목(<이것이 인간인가>)을 질문을 던지게 한다. 과연 인간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무엇보다도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와 같은 지옥이 일어나고 있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는데 정작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촛불을 들고, 일인시위를 하고, 참상을 알려내는 퍼포먼스를 해도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사람 숫자는 늘어가고 있다는데서 느껴지는 무력감. 일전에 만났던 이스라엘의 병역거부자는, 그리고 종종 소식을 듣곤 하는 이스라엘의 병역거부 운동그룹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짝 (비겁하게 이를데없는) 원망의 감정마저 든다. 이스라엘의 학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진정 아무것도 없는지….

어쩌면 할 수 있는 모든 저항은 이스라엘의 행동을 막기 위함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실제로 걷어내기 위함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다만 저들이, 저 끔찍한 학살을 저지르는 자들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씻어내기 위한 발악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가해자는 일말의 수치심도 가지지 않지만, 피해자는 가해자의 수치심까지도 떠안고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적 숙명을 지켜나가야 한다. 유엔인권이사회의 이스라엘 비난 결의안을 기권한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피해자보다는 가해자 쪽에 삶을 기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마치 서구사회가 모든 죄를 나치에게 몰아버렸던 것처럼 쉽게 이스라엘에 악마의 굴레를 씌우며 우리는 상관없는 일인양 대하거나, 혹은 알량한 동정심으로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나에게 이스라엘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에 동조하는 모든 행동들은 우리가 그래도 인간이라는 기막힌 슬픔을 지켜가고자 하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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