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살리기, 빠를수록 좋은 법’이란 제목을 붙여 당원과 기자들에게 배포한 ‘주요법안 해설자료’라는 문건에서 한나라당 정책위원회는 ‘재벌 방송’, ‘조중동 방송’ 양산 우려를 낳고 있는 신문 방송 겸영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정부에서는 미디어의 공익성을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던 산업적 측면에 대한 고려 또한 중요하다는 것임. 언론의 다양성 등 공공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변화된 환경에 맞게 미디어의 산업적 경쟁력을 강화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미디어가 생존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함.” 또, 신문 방송 겸영을 포함한 방송법 개정안을 “규제완화라는 시대적 조류와 글로벌 미디어 기업의 기틀 마련이라는 방향성 차원에서 수립한 원칙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40여 쪽을 미디어 관련법에 할애한 이 홍보자료를 읽다보면 매체 간 융합이라는 세계적 조류에서 우리만 멀찌감치 뒤처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커뮤니케이션의 횡포 (이냐시오 라모네, 2000)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손쉽게 빠져들곤 하는 ‘글로벌화’의 유혹은 달콤함의 이면에 쓰디쓴 재앙을 간직한, 부작용을 적시하지 않은 ‘나쁜 약’과 같다. 우리보다 앞서 ‘발전’을 경험한 해외 각국의 미디어 시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발전’의 결과라는 것이 분명 ‘언론의 공공성·공익성’ 또는 ‘정보의 진실성’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미디어들 사이의 무자비한 경쟁은 상업적 압력의 강화를 부르고, 언론계가 아닌 기업 출신 경영주들을 미디어 업계로 갈수록 더 많이 불러들이고 있다. 과거에도 정보는 돈이었다. 하지만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매체 간 경계가 어느 날 허물어지자, 미디어가 생산하는 정보의 ‘진실성’을 압도할 만큼 ‘상업적 가치’가 훨씬 더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뉴스를 판단하는 가치도 판이하게 달라졌다. 폴란드 저널리스트 리자르 카푸킨스키는 “예전에는 뉴스의 진실성이 가장 큰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신문의 편집국장 또는 부장은 더 이상 뉴스가 진실이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그것이 흥미롭기를 요구한다.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되면 싣지 않는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대단한 변화이다.”라고 했다.

퇴행적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이런 미디어 융합 시대의 필연적 변화에 불을 지른 것은 텔레비전이다. 저자는 미디어업계의 위계체계 내에서 꼭대기를 점한 텔레비전이 다른 미디어에 강요한 가장 타락한 모습의 첫 번째로 이미지에 대한 현혹을 들고 있다. “강한 이미지들을 낳는 사건들-폭력, 전쟁, 재난, 고통-이 뉴스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엄격하게 보아 그 중요성이 부차적인 경우일지라도 그것들은 다른 주제들보다 우선적으로 다뤄진다. (…)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정론(正論)을 지향하는 매체들조차도 어떠한 영상으로도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없는 심각한 위기들을 등한시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미지가 여왕처럼 군림하고, 이미지가 없으면 현실도 없다. 진실은 외면되고 사실은 누락된다. 아무리 중요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화면이 없으면 좋은 뉴스 취급을 받지 못한다. 사건의 중요성은 이미지의 풍요로움에 비례한다! “미디어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말이나 텍스트들은 이미지보다 가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저자의 말대로 텔레비전 뉴스가 기능하는 이러한 원칙들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의 성립을 매우 어렵게 한다. 뉴스=자유=민주주의.

덜 중요한 뉴스가 더 중요한 뉴스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는 ‘병풍효과’는 정보 과잉 시대에 ‘민주적 검열’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검열로 귀착된다. 뉴스가 너무 많아서 뉴스가 은폐되거나 삭제된다는 모순. 거짓으로 점철된 수많은 걸프전 보도가 실제로는 전쟁 자체를 은폐했다는 점에서 장 보드리야르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제목의 책을 썼고, 한 프랑스 학자는 급기야 이렇게까지 언명한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을 하면 할수록 더 적은 정보를 전달하게 되며 따라서 더 많이 정보를 왜곡하게 된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 한없이 풍요로운 이미지들로 점철된 뉴스(=정보)의 홍수 시대에 수용자(독자와 시청자)는 가난하다는 역설의 생산논리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쟁이 각기 다른 제품들을 생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다른 모든 산업과는 정반대로 미디어 산업에서 경쟁은 기자들로 하여금 모방력을 발휘하게 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데 그들의 모든 재능을 바치게 한다.” 미디어들 사이의 과도한 경쟁 과정에서 이런 무의식적인 모방행위는 일종의 ‘자가중독’처럼 기능해, 정보의 수없는 반복이 진실성의 증명을 대체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 저자인 이냐시오 라모네(1943~). 현재 프랑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신문의 편집주간이다.
이런 뉴스의 획일화가 가져오는 폐해는 끔찍하다. 모든 미디어가 똑같은 거짓말을 진실이라 주장하고 있다면, 수용자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시민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들과 연결되기 이전에 이미 상품으로서 시장과 수요공급의 법칙에 대부분 종속”된 정보는 급기야 수많은 속임수와 위조의 대상이 된다. 25살에 이미 천재로 불렸던 <뉴 리퍼블릭>의 기자 스테판 글래스의 사례(이 이야기는 <섀터드 글래스>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를 비롯해 이 책에 소개된 깜짝 놀랄 만한 날조기사들은 미디어들 간의 격한 상업주의적 경쟁이 미국와 유럽에서 어떤 탈선들을 조장해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더욱이 동일한 미디어그룹에 속한 언론사들 간의 공모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는 점도 심각한 주목을 요한다. (삼성 비판에 극도로 인색한 중앙일보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걸프전 당시 가장 호전적인 목소리를 낸 미국의 NBC는 주요 군수업체의 하나인 GE(제너럴 일렉트릭) 그룹에 속해 있다. 복합미디어그룹에 속한 미디어기업의 보도는 결국 모기업과 계열사의 이해관계를 배반할 수 없게 된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미래라면?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디어 분야 역시 전 세계적 신자유주의 기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그런 세계적 조류가 정상적인 비판기능을 수행하는 언론이 설 자리를 갈수록 잃게 만든다는 점은 점점 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때로는 정치권력에, 때로는 경제권력에 몸을 섞으며 언론은 “세계의 지배자들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어느 대목에서 저자는 그런 언론과 언론인들을 가리켜 ‘새로운 집 지키는 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심각한 제목의 이 책은 갈수록 심화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횡포’가 민주주의의 버팀목이 되기는커녕 천덕꾸러기 훼방꾼으로 전락해가는 서구 선진 언론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주는 훌륭한 반면교사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글로벌’ 서구 미디어의 이런 실상이 경제를 살리겠다며 한나라당이 마련한 방송법 등 이른바 미디어 관련법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그래서 아무리 거듭 문제의 ‘해설자료’를 뜯어봐도 산업의 ‘논리’만 넘쳐날 뿐, 우리보다 한참 앞서 간다는 서구 미디어업계에서조차 갈수록 퇴색해가고 있는 언론의 공공성·공익성의 ‘철학’에 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볼 수가 없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시의 저서 <세상을 바꾼 탐사보도/ 밀라이 학살과 그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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