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의 잇단 휴전 촉구와 인권침해 비난 결의안 등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가자지구 공격을 멈췄다. 스스로 침략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만, 전쟁을 멈추게 하려는 국제사회의 부단한 노력이 없었다면 길든 짧든 팔레스타인인들의 속절없는 희생도 더 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등 중동을 방문해 동분서주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상한 점은, 그의 소속국가이자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인 한국 정부가 너무나 잠잠했다는 것과, 그의 활동이라면 미주알 고주알 주워섬기던 한국 언론들도 유엔과 그의 활동에 이렇다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유엔 인권이사회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무차별 군사공격과 인권침해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을 때에도 한국은 기권표를 던졌다(찬성 33, 반대 1, 기권 13). 이에 앞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지난 8일 이스라엘-하마스 휴전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당시 안보리 15개 이사국 중 유일하게 미국이 표결에 기권하기도 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다며 열광하던 정부의 ‘기권’에 대해 야권과 시민단체들은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인권의 보편성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인권 기준이 전혀 보편적이지 않으며 실제는 자국의 이해와 국가간 역학관계에 따라 이중, 삼중 잣대를 들이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민주노동당도 “이번 기권은 이명박 정권이 가지고 있는 반인권적 속성을 국제 외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의 기권표결에 대한 시민단체와 야권의 비판이 높아지자, 문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지난 15일 정부의 기권 표결에 대해 “결의안 내용 가운데 모든 당사자의 국제인권법 존중 등에 대해선 지지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의 주장을 균형있게 포함하고 있지 않고, 유럽연합과 일본 등 상당수의 국가가 (비판적) 의견을 표명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외교통상부의 해명은 앞서 다른 사안에서 보여준 태도를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한겨레>는 16일자 인터넷판 기사 ‘MB정부 ‘인권잣대 그때그때 달라요?’’에서 “이런 설명은 지난해 11월 유엔총회 제3위원회의 북한인권결의안 채택 과정에서 정부가 “인권은 인류보편적 가치이므로 여타 사안과 분리해 인권문제 그 자체로 다뤄야 한다”며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해 찬성 표결한 것과 사뭇 다르다”고 달라진 태도를 지적했다.

반면 조중동을 포함한 신문 대다수는 MB 정부의 ‘점령된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적 공격으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관련 유엔인권위원회 결의안 ‘기권’에 대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을 닫았다. 한겨레도 인터넷판에만 관련 내용을 실었을 뿐이고, 종이신문에서는 이를 지적하거나 이에 대한 외교통상부의 해명, 혹은 이를 비판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남의 나라 문제라 ‘불보듯 남 얘기만 전하면 된다’는 것인지, 아니면 신문들의 ‘인권감수성’이 대체로 낮은 수준이어서 그런 것인지?

시곗바늘을 조금만 앞으로 돌려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사례와 쉽게 만나게 된다. 지난 노무현 정부로 가보니, 또다른 유엔의 인권관련 결의안 ‘기권’이 존재했다. 지난 2007년 11월21일 노무현 정부는 북한인권결의안과 관련해 기권을 했다. 지난 2003년 유엔 인권위원회 표결에 불참하고 2004~2005년에도 기권해오던 중,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을 이유로 찬성표를 던졌다가 다시 이듬해 기권한 터였다. 당시 조중동의 비난은 거셌다.

<조선일보>는 이날 8면 ‘북핵협상 차질 생길라 韓美 북한인권에 쉿’에서 “북한 눈치보기의 전형”이라며 2006년 찬성표에 대해 “‘선거’때문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조선은 같은날 사설 ‘盧 대통령, 北 동포 참상 덮고 정치 쇼 하려 말라’에서 “다른 문제도 아닌 인류 보편의 인권문제에서, 그것도 제 동포들이 당하고 있는 참상을 놓고서 이렇게 아무 원칙도 없이 오락가락했다”면서 “임기말 외교쇼에만 정신이 팔린 대통령에게 북한 주민의 참상이나 외교정책의 일관성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고 맹비난했다.

▲ 조선일보 2007년 11월 22일치 사설
<중앙일보>도 같은날 2면 ‘노 대통령, 표결 직전 결정’에서 이를 다룬 후 사설 ‘북한 인권 외면하는 노무현 정부’를 통해 “‘정부’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한심한 처사”라며 “우선 인권 개념에 대해 무지를 드러냈다. 인권은 국제사회에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인류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은 지 오래됐다”면서 “입만 열면 인권을 내세운 이 정권이 북한 인권에 대해선 임기 내내 비겁한 태도를 보인 것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국격에 심대한 손상을 끼친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 중앙일보 2007년 11월 22일치 사설
<동아일보>도 이날 2면 ‘“北인권 나아진 것 없는데 또 기권”’, 3면 ‘南도 北도 포용못한 포용정책…총체적 재검토 필요’를 통해 대대적인 노 정권 비판에 가세했다. 이어 사설 ‘盧정권 안중에는 국민도, 북한 주민도 없다’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마땅히 찬성표를 던져야 했음에도 외면한 것”이라며 “이 정권의 안중에는 우리 국민도, 북한 주민도 없다. 오직 낡고 섣부른 ‘그들만의 코드’가 있을 뿐”이라며 ‘코드론’을 들어 맹비난했다.

▲ 동아일보 2007년 11월 22일치 사설
한편 당시 <한겨레>는 같은날 8면 ‘앰네스티 “대북인권결의안 한국 기권 실망”’에서 “국제인권단체들도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는 분위기를 전하면서 “정부의 방침 결정도 난산의 연속이었다”며 “국제사회의 비판적 여론이 부담스럽지만, 정상 회담 이후 탄력을 받고 있는 남북관계의 진전과 정책 일관성을 더 중시하겠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 한겨레 2007년 11월 22일치 사설
조중동이 북한인권결의안을 언급할 때 빠뜨리지 않는 것이 ‘보편적 인권’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남북관계의 특수성에 앞서 모든 인권을 예외없이 지지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중동의 이런 언설은 지금도 안보 등 수많은 특수성을 들어 국내 인권에 대한 제약과 억압을 앞장서 주장하고 있는 것과 배치된다. 북한에 대해서만 ‘특수’하게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권에 대한 ‘이중적’이고 ‘모순’된 태도는 미국이 도발하거나 뒤를 봐주는 모든 전쟁에 대해 예외없이 ‘보편적’임을 이번에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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