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은 조인성의 엉덩이다. ('스포' 포함) - by 나난

“노출수위가 어느 정도길래?”

19금 영화가 등장하면 으레 노출수위에 대한 궁금증이 먼저 생기기 마련이다. 초기 노출수위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스타는 <해피앤드>의 전도연이었다. 당시 전도연이란 배우가 <해피앤드>를 선택한 것은 영화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의 작품성을 위한 배우들의 노출 선택은 자연스러워졌다. 이후 여배우의 노출과 흥행이 비례한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고 그 설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타짜>의 김혜수, 최근 흥행에 성공한 <아내가 결혼했다>의 손예진, <미인도>의 김민선이 파격적인 노출이 화제가 됐고 흥행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출수위에 대한 궁금증의 대상은 언제나 여배우였다.

▲ 영화 '쌍화점' 포스터 및 스틸컷
그러나 최근 개봉해 절찬리 상영 중인 <쌍화점>에서 그 궁금증의 대상은 단연 조인성이다. 감독 역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CF 스타이기도 한 그를 이렇게 육욕적으로 확 벗겨도 되는 걸까”라고. 그만큼 영화에서 조인성의 노출이 주목받는 이유는 조인성 급(나이, 스타성, 레벨) 남성 스타의 노출과 베드신이 아직은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노출과 베드신으로 연기를 시작해 노력 끝에 스타가 된 경우는 많지만 스타가 되어 노출과 베드신으로 가는 남성스타들은 별로 없다.

때문에 모든 언론들이 지금 바로 조인성을 주목하고 있다. 영화 쌍화점의 완성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다. 공민왕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유하 감독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연출력과 탄탄한 시나리오도 한몫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영화의 완성도는 보장될 수 없다. 어떤 역에서든 항상 최선을 다하는 연기자들이지만 쌍화점에 등장했던 주인공들의 연기는 어느 때보다 빛났다.

고려라는 한 나라의 왕으로 태어났지만 여자를 품을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왕으로 분한 주진모. 그는 자신이 사랑한 ‘홍림’이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됐을 때의 분노에 찬 감정을 잘 표현했다. 마지막 ‘홍림’을 칼로 찌른 후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정인이라 여긴 적이 있느냐”라고 묻는 절절한 사랑연기는 관객들의 가슴을 후벼 파기에 충분했다. 원나라에서 고려왕과 결혼했으나 다른 이를 사랑하는 왕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비운의 왕후로 분한 송지효.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고자 던진 “이제 너밖에 남지 않았구나”라며 왕의 암살을 지시하던 연기는 ‘왜 송지효였을까’라는 의문을 사라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정인이라 여긴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없습니다”라며 왕을 칼로 찌르고 자신 역시 다른 호위무사에게 찔려 죽어가던 ‘홍림’이 왕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려 자신에 의해 죽은 왕을 애절하게 바라보던 장면에 있다. 그 장면에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담겨있다. ‘홍림’ 역시 왕을 사랑했었다는 단초이며 왕이 죽기 전에 자신이 준 상처에 대한 미안함의 교차였을 것이다. 사랑했던 한 남자와 사랑하게 된 한 여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해야만 했던 조인성의 감성 연기 역시 쌍화점을 완성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언론들이 조인성을 주목하는 이유는 작품을 위해 노출을 선택한 용기에 있다. 조인성이 연기한 ‘홍림’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모른 채 자라난 인물이다. 영화 초반 왕과의 격한 섹스신에서도 등장하지 않던 조인성의 엉덩이(누군가는 전라라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뒤태라고 했다)가 왕후와의 섹스신에서 등장하는 이유는 ‘홍림’이란 인물의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조인성의 ‘엉덩이’는 왕에 의해 억눌러진 성정체성을 왕후와의 섹스를 통해 육체적인 쾌감과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쌍화점에서 조인성의 노출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남자배우로서 의미 있는 선택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해피앤드>의 전도연만큼이나 <쌍화점>에서의 조인성 노출이 빛나는 이유다.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리는 그의 눈빛
- by 배여진

아마도 <게임의 여왕>이라는 드라마였던 것 같다. 주진모의 눈빛에 빠져 버린 게. 이보영과 함께 나왔는데 이보영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주 그냥 내 마음을 뚫어 내가 이보영이 된 줄 알았다(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한동안 그의 눈빛을 잊고 있다가 영화 <사랑>에서 다시 그의 눈빛을 만났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의 눈빛은 4% 부족해 보였다.

▲ 영화 '쌍화점' 포스터 및 스틸컷
<쌍화점>. 입소문만 믿고 사실 ‘조인성 엉덩이’를 기대하고 영화를 보러 갔다. 그 찐하다는 정사신과 조인성 엉덩이. 그러나 이게 웬걸, 나는 강한 인상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진모의 눈빛이라는 월척을 얻었다. 그의 눈빛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그것처럼 너무나 아련하고 애처로웠다. 때로는 장난감을 손에 쥔 마냥 폴짝 뛰기 1초 전 어린 아이와 같은 눈빛이었고, 때로는 미칠 듯이 외로운 눈빛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애처롭게 쳐다본 적이 있던가.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분명 뒤통수 꽤나 아플 만큼 차여보이기도 했고, 내가 생각해도 불꽃 싸대기 오만대 정도 맞아도 될 만큼 재수 없게 차버린 적도 있었다. 주진모의 눈빛은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 때문에 베갯머리 축축하게 젖을 만큼 눈물을 흘린 뿌연 기억을 더듬게 하는, 왠지 모르게 지나간 옛사랑들을 추억해보는 눈빛이었다.

자신을 정인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냐는 그 말 한 마디 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홍림이와 자신 둘만이 아는 온갖 비밀들, 둘만이 나누던 사랑, 둘만의 속삼임, 분명 받는 사람도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았을 그 숱한 시간들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있을 터였다. 누구나 이별의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이 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었던가, 혹은 상대방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리 뒤통수 아프게 차이거나 아팠어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악몽이 아닌 추억이 되는 것처럼, 결국 세상을 뜨기 전 홍림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사람은 바로 주진모가 아니었던가. 안타깝게도 이미 주진모는 세상을 떴지만.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눈빛은 너무 귀여워서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서 볼을 살짝 꼬집어 주고 싶었던, 홍림에게 선물로 줄 말을 쓰다듬는 장면이었다. (내가 이미 주진모의 눈빛에 빠져들어 그랬는지 몰라도) 그 장면에서 주진모의 눈에서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반짝반짝’이 한 가득이었다. 감독의 의도였는지 몰라도, 이 선물을 받으며 좋아할 사람을 생각하며 아이 같이 천진난만하던 주진모의 눈빛은 굉장히 빠르게 질투와 실망의 눈빛으로 돌변한다.

그렇다. 사랑이란, 바로 그렇게 사람을 한 순간에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을 얻었을 때 혹은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을 때 그 설레임은 사람의 그 어느 곳도 아닌 눈빛에 한가득하다. 또 반대로, 사랑을 잃었을 때 혹은 사랑이 곧 떠나리라고 직감했을 때 그 슬픔도 사람의 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눈빛에 담아낸다.

사람의 눈빛은 그만큼 사람의 감정을 가장 잘 담아내는 그릇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눈빛으로 말하고, 눈빛으로 느끼는 것이라 하나 보다. 주진모의 눈빛. 그가 못다 이룬 사랑의 슬픔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을 가지게 하였다. 그래서 난 조인성의 엉덩이보다 주진모의 눈빛이 더 좋았다. 조인성의 엉덩이에서 사람의 깊은 슬픔, 사랑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성간이든 이성간이든, 마음껏 하지 못하는 사랑은 늘 슬프다. 마음껏 해도 아쉬움이 남고 후회가 남는 것이 바로 사랑인데,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은 얼마나 가슴 아픈가.

주진모는 인상이 부드럽기보다 매우 강렬한 마스크를 갖고 있다. 강한 인상 속에서 나오는 슬픈 눈은 그래서 더 슬펐다.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사랑하길 바란다. 아니 그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주진모의 그런 슬픈 눈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마음껏 사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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