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여고 1학년. 바덴바덴에서 1988년 올림픽 유치 결정지로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세울~ 코리아’를 감격스럽게 들었다. 그 시절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고등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을 올림픽을 통해 세계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을 때깔나게 만들어줄 맘씨좋은 아저씨’처럼 비쳐졌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 서울 한강과 올림픽 공원을 뒤덮던 1988년, 6개월의 짧은 서울 생활을 마감하고 정작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번영을 가까이서 보지 못한 채 고향으로 향했다. 서울 올림픽은 나 개인에 있어서도 역사의 분기점이다. 모교의 대학 연구소에서 1년여 남짓한 조교생활과 서울에서 스크립터 생활 6개월을 제외하곤 1988년 올림픽과 더불어, 그때부터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으니까…….

▲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중인 김사은 PD
1987년 6.29 선언 이후 신문사 설립이 자유화됨에 따라 전라북도에도 기존 <전북일보>외에 <전북도민일보>와 <전라일보> 두 개의 신생 신문사가 설립되었다. <전라일보>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휴가차 고향을 방문했다가 때마침 대학 은사님으로부터 ‘이러이러한 신문사 시험이 있으니까 한번 응시해봐라’는 권유로 시험을 친 것이 덜컥 합격했던 것이다.

미련없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전주에 삶의 둥지를 틀었다. 아흐~ 이제 내 삶은 탄탄대로이며 인생 빵빵하게 펼쳐질 것이다? 몇 년 뒤 펼쳐질 질곡의 세월에 비하면, 젊은 나이에 그런 희망과 기대라도 있기 천만 다행이었다. 그때는 꿈을 꿀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애초 투철한 기자관이나 언론관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대학시절 최루탄 속을 헤집으며 전형적 386세대의 고민과 갈등을 안고 ‘대학신문사’에 몸담았던 것의 연장선상과 같은 느낌이었다.

최연소 합격자였고 지금처럼 여기자가 많았던 때도 아닌데다 대학시절 대학신문사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그 친구, 쫌~ 합디다”와 같은 평가도 들었다. 새로운 신문사에 대해 독자들은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이며 거침없는 질주와 새로운 언론 환경에 기대를 걸었다. 무엇보다 당시 우리들은 회사의 사시인 “정론직필”을 가슴에 품고 ‘열정과 패기’로 똘똘 뭉쳐있었다. 선배들은 사주와 약속한 ‘편집의 독립’을 믿었고 우리는 정의를 믿었다. 두려운 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총선기사와 관련, 경영주는 당시 집권당을 옹호했고 편집권의 독립을 기치로 한 노조와 충돌하기에 이른다. 몇 년간의 길고 긴 싸움, 휴·복간을 거듭하며 경영주가 바뀌는 과정을 거쳐 새 사장이 폐간을 결정했다. 그 와중에 일찌감치 언론인의 꿈을 접고 사업을 시작한 동료도 있고 다른 언론사로 자리를 옮긴 동료도 있었다. 한 사내 커플은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직장이 폐쇄되는 황당한 일도 겪었다.

나 역시 그 무기력증과 표출할 수 없는 분노와 대상없는 갈등으로 20대 후반을 암담하게 보냈다. 휴간, 폐간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난, 대인기피증, 신용추락의 위기 등 심신의 고통과 경제적 압박감이 최대 가중치로 인생을 짓눌렀다. 한창 펄펄 날고 뛰며 일해야 할 20~30대의 동료들이 일터를 잃고 겪은 심적 고통은 어떠했을까? 가장이던 그들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처럼 삶의 위로가 되는 명언도 없는 듯하다. 세월은 가고 그래도 동료들은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대로 언론사에 남은 사람도 있고 사업으로 자리잡은 사람도 있고 물론, 몇 차례 뒤엎어먹은 사람도 있다. 우리의 <전라일보>는 폐간 이후 전라남도의 한 신문사에 제호가 팔렸다가 다시 전북에서 되찾아 <전라일보>라는 명칭으로 계속 발간되고 있다.

‘원조 전라일보’의 동료들은 1998년 창간 10주년을 맞아 모인 것을 계기로 1년에 한두번씩 정례 모임을 갖고 있다. 2007년까지는 그냥저냥 만나서 저녁 먹고 소주 들이키고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 회고하다 어깨동무하고 노래 한곡씩 하고 헤어지곤 했는데, 한 달 전인 지난 연말 “딱 20주년 되는 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바람에 갑자기 의미심장한 송년모임이 되고 말았다.

모 일간지 호남본부장인 선배가 백발을 휘날리며 식당에 들어선 순간, 와락 눈물이 솟구쳤다. 그 시절, 30대 중반의 카랑카랑하고 의기롭던 선배의 모습에서 완연한 세월의 흔적을 느낀 것이다. 공교롭게 그날 지방지의 편집국장을 거쳐 논설위원을 지내던 선배는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30여 년간의 기자 생활을 마감하는 날, 또 다른 선배는 그 선배의 어깨를 툭툭 치며 “형! 진짜 잘했어. 우리 진즉 이랬어야 했어. 이제 맘 고생 그만하고 편히 쉬어”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출판업을 하고 있는 편집기자 출신의 J선배는 일부러 먼길을 달려와 한사람씩 뜨거운 포옹을 했다. 20년 세월의 깊이만큼 뜨거운 포옹이었다. 반백의 성근 머리를 휘날리며 주름을 드리운 얼굴이지만 그래도 20년 전을 회고하는 그들의 표정은 맑고 아름다웠다. 술잔이 드높게 부딪치고 통기타에 맞춰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가 울려 퍼지는데 밖에선 함박눈이 폴폴 휘날렸다. 누군가 10년 전 작고한 대선배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 지금 말야~ K선배가 오신 거 같아. ‘느그들 왔냐?’ 그러시잖아.” 아닌게 아니라 K선배가 바바리 깃을 세우고 목도리로 눈을 털면서 ‘느그들 벌써 왔냐?’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같다. 다들 K선배를 기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어느 만남이나 첫정이 중요한 것 같다. 대부분 첫정이었던 직장이었던 만큼 그곳에 쏟은 정열과 사랑은 뜨거웠다. 무엇보다 우린 순수했다. 중앙지 주재기자로 자리를 옮긴 동료들은 본부장이 되었고, 지역신문사의 동료들은 편집국장도 되고 사장도 되었다. 충분히 능력있는 동료들이었고 또한 그럴 나이도 되었다.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까. 나는 가끔 그 20년을 돌아보며 그 세월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왔나 생각해본다. 그리고 따르던 선배들에게 20년 전 그 호칭 그대로 물어본다. “형, 20년 전, 우리가 왜 싸웠을까? 우리의 싸움이 우리가 지역언론발전에, 언론민주화에 기여를 했을까? 우리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고, 나는 왜 그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

2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월급이 적어도, 일이 많아도,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취재해서 마감하고 가게에서 들이키는 맥주 한잔이 그렇게 달았지. ‘잘 해보자’고 한 거였잖아. 잘 해보려는데 방해하니까 그런 거였잖아. 그렇게 해야 하고~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간에 그 순간 최선을 다하면 그게 잘 사는 거야. 난 후회없어. 최소한 부끄럽지는 안잖아.”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제 지나간 20년이 아니라 돌아올 20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다시 나의 20년을 돌아봤을 때, 최소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방송계에 몸담은 지 어느덧 15년, 이일 또한 20년을 회고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니 마음이 바빠진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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