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내내 즐겁고 유익했다. 누구 표현대로 나에게는 '참 좋은 방송'이었다. 14일 방영됐던 <MBC> ‘무릎팍도사 이순재편’에 대한 이야기다. 평소 TV를 꾸준히 보는 애청자는 아니지만 이순재 ‘할배’가 출연한 <사랑이 뭐길래> <거침없이 하이킥>은 나름 방송시간을 기다리며 보기도 했다. <엄마가 뿔났다>의 경우 엄마가 즐겨보시기에 보게 되긴 했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밖에도 <허준> <이산> <베토벤바이러스> 등 그가 출연한 드라마는 ‘대박’ 여부를 떠나 보는 이에게 ‘거부감’ 없고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게 하는 매력을 주었던 것 같다.

▲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방송 캡처ⓒMBC

꺾어진 150 나이의 연기자 이순재

이순재씨는 ‘로맨스 멜로 주인공 역할을 하고 싶다’는 고민을 안고 무릎팍도사를 찾아왔다. 예전 출연했던 <엄마가 뿔났다>에서 안여사(전양자 분)와의 키스신이 화제가 됐던 것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연출 의도와, 우리나라가 고령화 사회로 이행 중에 있음에도 터부시되는 노인들의 사랑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어우러진 주제 선정으로 보인다.

사실 그가 ‘2030세대’에게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건 <엄마가 뿔났다>보다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 캐릭터이다. 당시 그 장면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한의사 원장인 이순재 할아버지가 주식투자를 전업으로 하고 있는 ‘백수’ 아들 정준하의 컴퓨터에서 발견한 ‘유망주식’이라고 적힌 폴더 그리고 그 안의 ‘야동’ 한 편에 빠져드는 그의 모습은 당시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야동’에 대해 금기만이 만연한 사회 현실을 전복하고 조롱하는 캐릭터로 젊은 세대의 스타이자 아이콘이 됐다. 이후 '야동'으로 인터넷에 파란을 일으켰던 ‘김본좌’ 사건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물론 이순재씨의 연기와 캐릭터를 두 가지로 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드라마 <허준>에서 의학계의 정신적 지주인 히포크라테스를 연상케 한 허준의 스승 역할과 <이산>에서 호랑이가 포호하는 듯한 왕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정조의 연기를 빼놓을 순 없다. 본인이 밝혔듯이 젊은 시절 출연했던 드라마는 방송국에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볼 수가 없다고 하니 연기자로서 이순재씨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만 50여년의 연기자 인생을 살아오면서 앞으로도 ‘대본을 외울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이 허락될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말과 연기를 하면서 '어떠한 특권이나 배려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말에서 배우계의 ‘장인(匠人)’이나 ‘마에스트로(maestro)’라는 칭호는 아깝지 않을 것 같다.

▲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방송 캡처ⓒMBC

▲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방송 캡처ⓒMBC


이순재 ‘할배’가 들려준 방송의 역사

2009년 1월 중순이 다 되어가는 14일, 황금어장은 신년 첫 방송이다. 언론노조 MBC 본부의 총파업 때문이다. 재벌과 조중동이 방송국을 소유할 수 있는 정부ㆍ여당의 언론관계법이 날치기 처리되려 하자 파업으로 맞선 것이였다.

이 과정에서 방송을 민영화해야 된다, 중립화해야 된다, 그리고 미디어 산업발전론과 미디어 공공론 등 방송을 둘러싼 여러 의제가 도출되고 충돌했다. 방송프로그램의 시청자이자 소비자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방송국과 관련 된 '언론관계법'의 의제를 고민해보기에는 ‘정보’ 접근이 쉽지 않다.

의제에 참여하기 위해 알아야 할 정보에 '방송국 역사'라는 것도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방송 역사책을 펴고 ‘공부’하기엔 사실 좀 딱딱한 주제이기도 하다.

예능프로그램인 '무릎팍도사'에서 이순재씨의 에피소드를 통해 알려진 방송의 역사는 재미있고 유익했다. 코믹적인 요소와 산증인의 입을 통해 직접 전달된 생생함 때문이다.

▲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방송 캡처ⓒMBC

KBS의 전신이 된 1956년 대한민국 최초의 TV방송국 HLKZ로 데뷔해, 최초의 드라마에 출연한 뒤 1961년 개국한 KBS 첫 프로그램 출연 그리고 1964년 개국한 TBC에 최초 전속 탤런트로 활동, 1969년 MBC가 생겨나면서 본격적인 TV 시대를 열었다고 증언한다.

또한 젊은이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할배’가 ‘손자’들을 앉혀 놓고 편안하게 옛날이야기 하듯 던진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KBS가 개국하자 정보기관에 속한 이가 작가로 들어와 ‘반공’을 주제로 드라마를 제작하는데 배우가 필요하자 당시 최고 스타 영화배우인 최무룡씨에게 “출연해 주시죠” 하자 영화에 비해 ’허접‘한 방송 출연에 부담을 느껴 “스케줄 때문에…”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자 정보기관에 연락해 “최무룡씨 스케줄 좀 조사해봐, 국책사업을 하는데 이렇게 비협조적이면 이건 이적행위야”라고 하자 군말 없이 승낙했다고 한다.

비슷한 에피소드로 당시 모든 방송이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절, (반공)드라마도 예외없이 생방송 으로 방영되는 상황에서 전화가 울리는 장면에 전화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자 사색이 된 배우는 맨손으로 전화받는 연기를 했다고 한다. 방송이 끝나고 “소품 담당 어떤 놈이야”라는 호통과 함께 소품담당자는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의도적 아냐?”라는 추궁을 당하며 방송직을 그만 두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배우의 클로즈업을 잡기 위해 집채만한 카메라를 배우 코앞까지 들이대 방송 ‘울렁증’이 생길 수밖에 없던 일. 지금처럼 촬영 후 편집이 없어 한번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찍을 수밖에 없는 녹화현장 등의 옛 방송국에 얽힌 생생한 정보는 즐겁고 유익했다.

▲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방송 캡처ⓒMBC

이순재씨는 국회의원 시절에 겪은 경험(1992년 민자당 소속으로 14대 국회의원 당선과 부대변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연기자 인생에서 ‘외도’라고 볼 수 있는 ‘정치 경험’을 통해 현 사회에 대한 발언까지 예능프로에서 풀어내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다만 연출자의 기획으로 보이는 진행자 강호동씨의 강권(?)으로 다함께 ‘대한민국 파이팅’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난 뒤 이순재씨는 한두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이에 앞서 국민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는 말에 “저보다는 경제전문가가 나와서 경제위기를 극복할 청사진을 보여주면 그 이상 좋은 말이 어디있겠냐마는…”이라면서 운을 뗀 그 말속에 ‘눈물’의 의미가 담겨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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