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배’라는 이름은 통제되지 않는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다. 그래서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의 깡마른 몸에 가해진 인두질은 지극히 키치적으로 다가온다. 김두한이 1966년 국회의사당 안에서 인분을 투척하는 장면 정도는 돼야 ‘연출’도 살고 ‘편집’도 산다. 김두한은 삼성의 사카린 밀수와 정부의 비호에 비분강개해 ‘거사’를 벌임으로써 국회의원에서 제명되는 비운을 맛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회가 대통령에게 예속돼 있던 박정희 1인 독재 치하 시절의 얘기다. 다시 그런 시대가 돌아왔는지를 두고 토론이 벌어지는 현실이 비감하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뭇매를 가하는 2009년 정초의 풍경은, 협객의 시대는 오래 전 가고 지금 우리는 확실한 다구리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귀띔한다.

왜 (하필) 강기갑일까? 이 물음은 이른바 ‘국회 폭력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풍경한 정치투쟁의 본질을 향해 사유의 접시 안테나를 세우게 한다. 아직 이 물음이 제대로 던져지지 않은 건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어지럽게 둘러친 사이비 언어와 그 의제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 언어와 의제는 ‘강기갑 액션’의 맥락을 거두절미한 스틸사진 위에서만 구성된다. 폭력은 이유를 불문하고 용서받지 못할 악의 알파이자 오메가이지만, 감광지에 포착되는 폭력은 특정한 누군가의 특정한 폭력일 뿐이다. 이런 파격으로 연출된 폭력배 강기갑은 정작 매를 버는 ‘구타 유발자’다. 그는 이미 늑신하게 두들겨 맞았지만, 선빵으로 다구리를 날린 자들은 피해자로, 그는 가해자로 환유된다. 그들은 ‘차카게 살자’ 문신을 새긴 평화주의자들이다.

▲ 5일 국회 로텐터홀에서 농성중인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여의도통신
그들이 강기갑을 선택한 건 그의 작은 몸집이 만만해 보여서가 아니다. 강기갑이 한칼 하는 성깔이라는 것도 누구나 다 안다. 그들이 강기갑을 선택한 건 그에게서 동업자 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동업자 의식은 흔히 여-야의 정치적 분단선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들은 죽일 듯이 다투는 모습을 연출하다가도 동료 국회의원을 이를 때면 반드시 “존경하는”으로 운을 뗀다. 그 표현의 역설성은 기획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평소 언행이 빚어낸 연상작용의 우연한 결과물일 뿐이다. 이런 깍듯한 예의범절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동료 의원의 발언에 “잘 했어”라는 추임새를 넣을 때 전복의 미학으로 승화한다. 그들은 동업자이기에 뜬금없이 존경을 표하고, 거리낌 없이 반말도 지껄인다.

그들의 동업자 의식은 철저히 폐쇄적인 카르텔을 통해 단단한 결속의 성채를 구축한다. 차떼기 주범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여지없이 부결시킬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이 신성시하는 규범은 정직, 청렴 따위가 결코 아니다. 폐쇄적이기에 규범은 퇴행적이며, 그 규범을 어겼을 땐 동업자라도 가차없이 내친다. 2003년 보궐선거로 당선돼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선 유시민은 캐주얼 차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배 의원들에 의해 국회의원 선서를 거부당했다. 코를 뚫지 않으면 남성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할례를 하지 않으면 여성이 될 수 없는 아프리카 어느 부족처럼 이들도 삼엄하고 가파르게 규율을 사수한다. 넥타이에 정장이 아니면 옷차림이 아무리 단정해도 결코 동업자로 인정할 수 없다.

강기갑한테서는 도무지 카르텔의 폐쇄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정장을 입지 않는다. 그의 두루마기는 국회의원의 복식이 아니라 그를 국회로 보내준 산업직능의 상징이다. 그는 거리와 국회의 가교다. 국회의원이라면 선거철에만 반짝 벌이는 거리의 정치를 1년 내내 선호하면서도, 걸핏하면 국회 안에서 뻗치기(농성)까지 일삼는다. 그는 국회의 신성을 모독하는 게 아니라 동업자들의 폐쇄적 카르텔을 흠집낼 뿐이지만, 그들에겐 그것이 훨씬 위험한 체제 도전이다. 그래서 도저히 “존경하는”으로 운을 뗄 수도 없고, “잘 했어”로 추어올릴 수도 없다. 그는 동업자가 아니다. 지금은 국회 집사장을 하고 있는 전직 국회의원이 차라리 동업자이고, 그 집사장의 수하들에게 곁을 주는 게 훨씬 낫다.

강기갑이 국회를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무법천지로 만들었다며 대경실색과 비분강개의 집단연기를 펼치는 것이 그를 왕따시키려는 ‘겸손한’ 목적 이상이라는 건 이미 확연한 복선으로 드러났다. 그를 이 성채에서 완전히 적출/추방시켜 다시금 체제의 평화와 안정을 되찾는 것이 당면목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의 왜소한 몸에 김두한 같은 희대의 협객 낙인을 새기는 키치적 연출도 마다지 않는다. 그들이 실제 국회폭력방지법을 만들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제스처만으로도 강기갑의 선거법 위반 2심 재판에 적잖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계산은 이미 끝냈을 것이다. 그를 낙마시키고 나면 맏형처럼 무서우면서도 든든한 이방호가 다시 동업자가 되는 것도 따논 당상일 것이다.

하지만 폭력사태의 맥락과 인과관계, 일련의 선제적 폭력 사실들을 모두 자르고 지운 채 특정한 장면만 부각시킨 데 따른 후유증은 미처 내다보지 못한 것 같다. 성채는 이미 위협받고 있으며, 결정적인 원인은 강기갑이 아닌 그들 스스로 제공했다. 국회의원(들)이 안마당인 국회 본관 안에서 경위들에게 멱살잡히고 내동댕이쳐진 기억은 누군가에 의해 끝없이 환기되고 유통될 것이다. 무슨 법안들이 있는지도 모른 채 추호의 회의도 없이 날치기에 기꺼이 나선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기관이기는커녕 영문도 모르고 동원된 친위 쿠데타의 용병일 뿐이다. 솜털 보송보송한 전경들에게 수시로 신분증을 까야 하는 그들의 남루한 미래가 보인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한 다구리 자해공갈단의 우화적 기승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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