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가 조세도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3개의 회사를 설립했다는 사실이 뉴스타파 취재 결과 드러났다. 뉴스타파는 파나마의 로펌 모색 폰세카가 1977년부터 2015년까지 관리한 21만여개 페이퍼컴퍼니 등의 자료가 담긴 내부 자료 중 ‘Korea’로 검색되는 1만5천여 건의 파일에서 한국 주소를 기재한 195명의 한국인 이름을 확인하고,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을 1차로 공개했다.

뉴스타파는 자금의 흐름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추징금 납부를 230억원 앞두고 그의 장남이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김용진 대표는 4일 서울 중구 정동 뉴스타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쉽게도 현재까지 자금의 이동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금 1달러짜리 회사를 세운 목적은 명확하다. 조세도피처 법인 명의로 해외에 비밀계좌를 만드는 것이다. 국내 조세당국과 금융당국의 감시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자금을 운용하려는 목적이다. 노씨는 이혼 과정에서 재산이 공개될 우려에 처한 시기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추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진행 중인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 (사진=미디어스)

이번 건을 취재한 심인보 기자는 “자료 안에서는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회사를 설립하고, 이사직에서 물러난 시기와 정황 등을 보면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다. 추징금 납부를 중단한 상황에서 밝혀지지 않은 비자금을 은닉할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을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와 사돈지간인) SK와의 관련성도 있다. 재헌씨가 최근까지 등기이사였던 인크로스는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SK 계열사를 헐값에 인수하고 매출 대부분이 SK로부터 나왔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당시 재헌씨는 주소지를 홍콩으로 기재했는데 인크로스 홍콩 현지법인 대표 또한 재헌씨다. 만약 조세도피처에서 만든 회사가 인크로스와 관련된 것이라면 비자금 의혹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뉴스타파는 자료 분석 과정에서 노재헌씨 등 195명의 한국인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김용진 대표는 “이번 주에 한두 차례 더 기자회견을 열고 자료를 공유할 예정”이라며 “195명 중 두자릿수는 신원이 확인됐다. 일부는 ‘합법적 해외사업이고 당국에 신고했다’고 소명한 경우도 있다. 그 소명이 적합한지 자료를 직접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단순하게 개인 사업을 하는 분을 공개할 필요는 없고, 대기업과 오너 일가, 친척의 내용은 보도할 공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서류에는 설립 증서, 신청 서류, 신분증, 주주명부, 이사명부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중요한 정보는 ‘내부 메일’에 있다. 여기에 계좌 관련 정보가 있다. 핵심 정보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기업 관련 자료가 좀 나온다”고 덧붙였다.

조세정의네트워크 이유영 대표(동북아담당)는 4일 미디어스와 통화에서 “이번 조세도피처 보도가 의미가 있으려면 자료에 은행 같은 ‘금융기관’이 나와야 한다. 금융기관이 공개되면 페이퍼컴퍼니가 어느 규모로 활동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푸틴 대통령의 경우 자금 규모도 일부 드러난 것으로 안다. 역외설립 법인 숫자 정도 이상의 자료와 취재,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유영 대표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수준의 ‘등기소’를 설립하는 방법뿐이다. 그래야만 법인과 자본의 실소유주를 확인할 수 있다. 토마 피케티 교수와 공동작업을 한 임마누엘 사에즈 UC버클리 교수도 그런 주장을 하고 있고 점점 힘을 받고 있다. 과세주권, 상업조직의 비밀성 문제 때문에 이 같은 주장이 힘을 받지 못했지만 어두운 세계의 실상이 드러날수록 이런 체제로 이행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뉴스타파 김용진 대표는 “2013년 이후 해오 금융거래와 법인 설립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강했고 국회와 정부에서 관련 입법을 추진한다고 했으나 3년이 지난 지금 그런 약속들은 흐지부지됐다. 이런 틈을 타서 지금 페이퍼컴퍼니 수법이 교묘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뉴스타파가 공개한 조세도피처 자료는 지난해 독일 일간지 쥬트도이체차이퉁(süddeutsche zeitung, 남부독일신문)가 익명의 취재원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 파나마 최대 로펌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내부 자료다. 이 자료에는 모색 폰세카가 1977년부터 2015년까지 관리한 21만4488개의 페이퍼컴퍼니, 신탁, 재단 관련 내용이 들어 있다고 뉴스타파는 전했다. 이 자료의 용량은 총 2.6테라바이트이고 문서 건수만 1150만건에 이르는데, 쥬트도이체차이퉁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자료를 공유했고, ICIJ는 76개국 109개 언론사와 함께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라는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뉴스타파는 “공동 취재팀은 현재 대통령과 총리 등 각국 정상 12명과 그들의 친인척 61명, 고위 정치인과 관료128명, 그리고 포브스 갑부 순위에 이름을 올린 슈퍼 리치 29명이 역외탈세와 돈 세탁, 검은 돈 은닉 등에 연루된 사실을 밝혀냈다”고 전했다. 이 명단에는 마우리시오 마크리(Mauricio Macri) 아르헨티나 대통령, 비드지나 이바니슈빌리(Bidzina Ivanishvili) 전 조지아 수상, 시그뮌뒤르 다비드 귄뢰익손(Sigmundur Davíð Gunnlaugsson) 아이슬란드 총리, 살만 빈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흐만 알 사드(Salman bin Abdulaziz bin Abdulrahman Al Saud)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페트로 포로셴코(Petro Poroshenko)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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