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네르바 긴급체포에 관해 유일하게 확정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은 검찰이라는 국가기관 뿐이다. 검찰은 긴급체포한 박모씨가 미네르바임이 확실하고, 다른 미네르바는 없다고 이미 확정지은 입장이다. 검찰의 근거는 크게 두 개로 구성된다.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올린 글이 2개의 고정된 인터넷주소(IP)에서 일관되게 작성됐다는 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박모씨의 자술이다. 확보된 280여개의 미네르바 글 중에서 절반 정도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절반의 조사거리가 남은 상황이다. 검찰은 혐의를 두고 박모씨를 조사하기 위해 48시간 붙잡아 두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의 언론 플레이는 과하게 현란하다. 너무 앞서간다는 표현이 뻘줌할 정도이다. 미숙한 일처리와 상황을 급히 정리하겠다는 과잉된 욕심만 보일 뿐이다. 검찰은 지금 전형적인 공안의 문법으로 선정적으로 미네르바를 활용하고 있다.(과연, 미네르바가 긴급체포할 대상이 되느냐는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인터넷은 여전히 긴급체포된 박모씨가 진짜 미네르바가 맞느냐는 설왕설래로 뜨겁다. 반신반의이다. 일부 네티즌들이 제기하고 있는 음모설의 경우, 워낙에 스펙터클한 것이어서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런 얘기들을 할 수밖에 없는 모두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위로하기 위한 것쯤으로 이해하는 성숙함들이 눈에 띈다. 나라 전체를 충격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사안을 두고 검찰이 섣불리 움직였으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검찰을 온전히 믿지는 못하겠다는 반응이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검찰 자신이다. 그가 어떤 경로와 과정을 밟아 체포되었고, 주요한 혐의는 무엇인지를 차분히 설명하기 보단 그의 신상을 먼저 깐 책임이 검찰에게 있다. 불손한 의도가 있었다면 파렴치의 문제이고, 별 생각없이 그랬다면 무신경, 무능의 문제이다. 그의 신상명세는 하이에나 같은 언론에게 중요한 문제겠지만, 검찰이 먼저 브리핑할 내용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보호받을 권리가 있고, 검찰은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 조중동이 거의 민증에 가까운 그의 신상정보를 신났다고 소설 작법에 가까운 기사들과 함께 엮어낼 근거가 된 원천적 영감은 검찰이 제공했다. 검찰은 그를 ‘30대 무직, 전문대졸, 비전문가’라고 칭하며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수가 깊다고 해야 할까, 참을 수 없이 얕다고 해야 할까. 비열한 것일까, 영민한 것일까. 모르겠다. 다만, 국가기관이 할 일은 아니었다.

하여간, 체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통제되지 않는 환상을 단숨에 박살내고 말겠다는 검찰의 충정은 역효과를 낳고 있다. 체포된 사람이 미네르바가 맞다는 검찰의 확신이 확산되기는커녕, 검찰의 단호한 선정주의와 부단히 무식함을 비웃는 목소리가 높다. 비록, 퇴행적 정권을 뽑아놓긴 했지만, 한 번 진전된 시대의 양식과 수준은 위기 때마다 빛을 발하고 있다.

보다 분명해졌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미네르바 사건은 창궐에서부터 종료까지 그 내러티브 자체가 정부의 신뢰 지표가 풍비박산나는 과정과 일치하는 사건이 되었다. 미네르바 체포의 부당함은 간명한 논리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왜 주가가 3000 간다던 그 분은 체포하지 않는가? 맞다. 조롱이다. 그러나 이 조롱은 감정의 배설이 아니다. 정부를 향한 이성적 불신의 함축이자 논리의 궁극이다.

미네르바 긴급 체포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 정권의 수준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포악스럽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전 정권들과는 DNA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다른 정권이다. 미네르바에 대한 환상이 강화-유포되던 과정은 그 자체로 급락하던 정권의 신뢰도 문제였는데, 미네르바가 급박하게 체포되는 과정은 다시 정권의 포악한 수준과 맞물리며 ‘그럼, 그렇지’의 냉소를 확산시키며 정권의 바닥 신뢰도를 확인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과연, 미네르바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고난과 불안의 시대로 국민을 이끌고 있는 정부에 대한 반감과 반작용이었다. 극단적이고 일부 과격했던 그의 예측이 논리적 공박에 빠지지 않고 신화를 닮은 환상의 서사 구조로 유통될 수 있었던 건 그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다. 정부는 더 극단적이고 훨씬 과격하며 완전히 감정적이니까.

미네르바라는 환상을 잉태하게 만든 정부가 이번에는 그를 긴급체포라고 하는 낡은 클리셰로 옭아맸다. 굳이 법리까지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상식적으로 ‘공안’스러운 방법이다. 지금쯤 지하벙커에서 이제 괴소문은 없다고 자축이라도 하고 있을까? 하지만, 어쩌랴? 이미, 정반대의 효과는 시작됐다. 고단과 불안의 카타르시스로 존재하던 미네르바라는 환상에 순교자라는 외피까지 입혀준 꼴이 되고 말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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