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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마지막 5분을 지배한 이성민의 미친 연기력[블로그와] 탁발의 티비 읽기
탁발 | 승인 2016.03.26 10:48

누구나 할 것 없이 바쁜 한국의 40대 가장. 가족 기념일이나 휴일에 아빠로서 자리한 기억이 드물기만 하다. 그래서 모처럼만에 가족들과 외식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상사의 술자리 권유도 애써 거절하면서까지 준비했다. 바쁘고 골치 아픈 일이 있었지만 이번 외식을 까먹지도, 늦지도 않을 수 있었다. 성공적이었다.

박태석은 내심 뿌듯했다. 조금 늦은 듯싶었지만 그래도 매번 가족들을 바람맞히기 일쑤였던 자신으로서는 이 정도면 선방인 것이다. 그래도 가족들을 만나면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고 가족들은 왜 늦었냐며 조금 뾰로통한 반응을 보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정도면 간만에 아빠로서 도리를 하는 것이라는 만족감이 박태석의 발걸음을 어느 때보다 가볍게 만들었다.

tvN 10주년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기억>

그런데 그의 발걸음을 갑자기 멈춰 세우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이번만은 제발 그러서는 안 되는데 또 발이 멈췄다. 일 때문이 아니다. 당연히 술도 마시지 않았다. 기분 좋게 가족들과의 약속장소로 걸어가던 박태석의 씩씩한 발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바로 기억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내와 아이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내려 애를 써도 소용없다. 미안하지만 아내에게 전화를 걸려고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엎친 데 덮친다고 휴대폰도 어딘가 흘리고 왔다. 요즘 휴대폰을 잊고 다니는 것은 일상이 된 박태석이었다. 그렇다고 기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면서 다시 걸어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면서 발걸음은 분주한 이 속 터지는 상황. 왠지 박태석은 약속 장소만 잊은 것이 아니라 그 외 모든 것의 기억으로부터 격리되는 기분이 든다. 어딘지를 모르면서 찾아야 하니까 괜히 마음만 더 급해져 더 빨리 걷게 된다. 그리고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마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린다.

tvN 10주년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기억>

그때 가족들은 기다리다 못해 먼저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식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빠가 어디서 오나 통유리로 된 창밖을 셋이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면 지나치는 아빠를 발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머피의 심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머피의 잘못이 아니라 박태석이 그간 가족들을 실망시켰던 학습효과 때문이다. 아빠는 늘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기억> 3회는 마지막 5분에서 이성민의 연기가 폭발했다. 대사도 없었다. 몇 마디 하기는 했지만 마지막 5분을 지배한 것은 몇 줄의 대사가 아니라 이성민의 연기와 그의 심리를 반영한 연출이었다. 처음에는 어라? 하는 표정으로 시작해서 기억의 미궁 속에 갇혀 절규하는 표정까지, 이성민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또한 약속 장소라는 아주 사소한 기억 하나에 치열하게 매달리고 있는 박태석의 복잡한 심정은 알 것 없다는 듯이 흐르는 차량들의 행렬의 포커스를 날려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 연출은 이성민의 연기와 호흡이 딱 들어맞았다.

tvN 10주년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기억>

또한 이 장면에 특히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경험이 대단히 특별하지 않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알츠하이머가 아닐지라도 어느 순간 누가 훔쳐간 것처럼 기억이 사라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매일 오가던 주차장에서 자기 차를 못 찾고 헤맨다던지 하는 경험은 박태석의 또래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위기 상황이다.

그런데 이게 겨우 시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조마조마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박태석의 기억이 멀어져 갈수록 이성민의 연기는 더욱 폭발할 것 또한 알기에 묘하게 기대하게 되는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탁발  treeinu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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