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를 ‘저성과자’로 찍어 해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KT 노사는 2014년 인사평가에서 2년 연속 최하위 등급을 받는 노동자들을 회사가 면직할 수 있도록 했다. 해마다 돌아오는 희망퇴직 시즌에 눈치를 보며 스스로 사표를 내는 정규직도 많다. 재벌 대기업을 ‘원청’으로 둔 현장에서는 이보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소속은 하청‧도급업체이지만 평가는 원청이 하는 까닭에 ‘고용안정’이랄 것이 없다. 이른바 ‘건바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기술서비스노동자들은 원청과 하청이 마음만 먹으면 ‘저성과자’로 만들 수 있다.

노동조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하청‧도급업체는 졸지에 계약이 해지된다. 원청은 이럴 때 ‘저성과’를 이유로 든다. 수십, 수백명의 노동자는 저성과자가 된다. 원청은 이렇게 사용자 책임을 피하면서도 비용과 노조 리스크를 줄인다. ‘반노조’ 경영으로 유명한 태광그룹의 티브로드가 대표적이다. 경기도 시흥‧광명, 전북 전주에서 티브로드 케이블방송과 인터넷을 설치, 수리, 철거하는 노동자 51명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티브로드가 새로운 업체를 선정하지 않아 노동자들은 중간에 붕 떴고, 새로 선정된 업체가 이전 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고용을 승계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다. 2014년 씨앤앰 케이블기사들의 노숙농성과 고공농성이 장기화한 배경에도 원청의 ‘방기’가 있었다.

상시적인 고용불안은 원청에 사용자 책임을 지워야만 해결이 가능하다. 직접고용 정규직화가 근본적인 해법이다. 재벌사내유보금환수운동본부의 김태연 활동가는 17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술서비스 간접고용노동자 권리 보장과 진짜사장 재벌책임 공동행동’ 출범 기자회견에서 “300인 이상 기업의 간접고용노동자는 87만명이다. 규모가 크고 지불능력이 있는 재벌이 쌓아놓은 사내유보금 중 10조4400억원만 사용한다면 간접고용노동자를 모두 직접고용 정규직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시적이고 필수적인 업무에 노동자를 직접고용하는 데 ‘투자’하라는 이야기다.

박근혜 대통령조차 대선 공약으로 ‘필수상시업무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내걸었지만 정작 실제 나온 정책은 정반대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1월 저성과자에 대한 해고를 쉽게 만들고 회사에 취업규칙을 일방 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양대 지침’을 강행했다. 기업의 사업재편을 대폭 허용하는 ‘원샷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파견의 대상을 대폭 늘리는 파견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정부가 정리해고와 간접고용을 유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의 ‘노동개악’은 노동시장의 가장 밑단에 있는 간접고용노동자에게 직격탄이다.

▲17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술서비스 간접고용노동자 권리 보장과 진짜사장 재벌책임 공동행동’ 출범 기자회견 모습. (사진=미디어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민주노총이 50여개 노동‧사회운동단체들과 함께 ‘기술서비스 간접고용노동자 권리 보장과 진짜사장 재벌책임 공동행동’을 출범시킨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공동행동에는 정의당, 노동당 등 진보정당과 불교평화연대, 가톨릭농민회 등 종교단체도 참여했다. 공동행동은 “기술서비스노동자들은 저성과자 일반해고에 매우 취약하다. 사측이 일을 안 주거나 성과를 낼 수 없는 취약지역으로 보내버리면 저성과자가 되는 것이다. 사측이 찍으면 찍히는 것”이라며 “삼성전자서비스와 LG유플러스 등에서는 이미 저성과자 일반해고 지침을 활용한 공격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공동행동은 “각계각층 사회단체가 힘을 모아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진짜사장임에도 책임을 회피하는 재벌‧대기업에게 마땅한 책임을 묻는 활동을 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공동행동은 오는 26일 ‘진짜사장 재벌책임 비정규직 문제 해결 투쟁 선포대회’를 시작으로 4.13 총선 후보자들에게 △원청사업주의 하청노동자에 대하 직접교섭 책임 △하청노동자의 쟁의에 대한 원청사업주의 대체인력 투입 금지 △하청업체 교체시 고용, 근속, 단체협약의 승계 등에 대한 입장을 묻겠다고 밝혔다. 또 5~8월 ‘집중현장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박석운 공동행동 상임대표는 “재벌 대기업의 옷을 입고 일한다. 소비자들도 원청인 재벌 대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안다. 그러나 아니다. 바로 (다단계하도급이라는) 이 과정에서 노동권이 침해되고, 소비자들이 받는 서비스의 질이 하락한다. 방송의 공공성도 해친다. 이 문제는 ‘진짜 사장’이 직접 나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비정규직이 천만을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중 가장 열악한 노동자는 바로 ‘간접고용’이다. 노동조합이 가장 절실한 곳이다”라고 말했다.

공동행동 상임대표 중 한명인 김종인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상생고용대책을 발표했다. 언뜻 보기에 국민 달래기용인 것 같지만 사실 대책이랄 것이 없다. 오히려 정부는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양대지침을 강행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미 쉬운 해고가 만연해 있고, 임금이 삭감되고 있다. 민주노총은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고 법제도를 개선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공동행동 출범 기자회견에 참석한 구교현 노동당 대표는 “‘나쁜 일자리’ 재벌이 범인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사진=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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