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준. 어느 날 소녀는 아버지가 차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아버지의 곁에는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가 함께 있었다. 준이 아버지의 불륜을 어머니에게 말하자 어머니는 만들고 있던 계란말이를 준의 입에 넣으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다. 준은 아버지의 불륜 때문에 부부가 이혼하는 걸 모른다. 떠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와 싸워서 집을 나가는 거라면 준이 중재해 주겠다고 하지만,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답은 ‘너는 참 말이 많구나’였다.

아버지의 불륜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할 때 어머니가 준의 입에 넣어준 건 계란말이였다. 그 때문일까. 계란은 준에게 초자아(super-ego)로 작용한다. 마법을 걸어 여주인공에게 시련을 안겨 주는 마녀처럼 계란은 준이 말하는 것을 정죄하고 말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자신의 말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한다는 죄책감에, 어머니가 계란말이를 입에 넣어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기억이 결합된다. 이에 계란은 준에게 있어 초자아로 작용하고, 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정죄를 가한다.

영화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스틸 이미지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을 것을 명령함으로써 말하는 것을 잃어버린 준은 무엇으로 타인과 소통할 수 있을까.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에서 권상우와 이보영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말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소통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준 또한 말하는 것을 잃어버린 대신에 문자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린다. 문자라는 간접 소통의 방식으로 초자아의 억압을 대신하고자 하지만 준에게 있어 이 방식 또한 버거워 보인다.

하지만 준은 혼자가 아니다. 준의 곁에 있어주는 세 명의 급우와 함께 뮤지컬을 준비하는 동안 계란에게 말을 봉인당하고 정죄당한 초자아의 억압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이는 준이 뮤지컬을 준비하면서 말 대신 음악이라는 감성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찾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말을 할 줄 아는 준의 세 친구가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100% 표현하고만은 있지 않다는 걸 애니메이션은 보여주고 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대화로 표현하는 데 서투르거나 표현하지 않음으로 상대방에게 오해를 사거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말 또한 완벽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영화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스틸 이미지

하지만 계란이라는 초자아에게 억압당한 자신의 의사소통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준 스스로가 100% 노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준의 노력도 있었지만 타인의 도움을 받아 초자아를 극복한다는 점에 있어 애니메이션은 줄탁동시, 즉 계란이라는 초자아의 억압을 깨기 위해 준이 안에서 노력한다면 준의 친구가 밖에서 깨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준의 친구가 준의 초자아를 극복하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 있어서 이 애니메이션은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상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억압 혹은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건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적극적인 도움도 필요한, 줄탁동시가 이루어져야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