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만 PD 3명, 기자 1명이 KBS에 사표를 냈다. <태양의 후예>를 기획한 함영훈 PD, <직장의 신>을 만든 전창근 PD, <너를 기억해>를 만든 김진원 PD 등 드라마 PD 3명과 KBS 탐사보도팀 창립멤버로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등을 석권한 최문호 기자가 그 주인공이다.

종편과 케이블 채널의 성장으로 지상파 출신들의 ‘이동’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KBS 출신들의 이동을 ‘인력 유출’이라고 명명하며 우려하는 것은, 타사에서 훌륭한 성취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종편 개국을 앞둔 2011년부터 KBS 출신 스타급 PD들은 꾸준히 타 방송사로 옮겨와 저마다의 기록을 써 가고 있다. 신원호 PD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3번이나 ‘대박’을 터뜨렸고, 나영석 PD 역시 <꽃보다> 시리즈, <삼시세끼> 등 TV 예능에서부터 모바일 특화 예능 <신서유기>까지 성공시켜 CJ E&M을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김원석 PD는 <미생>과 <시그널>로 ‘웰메이드 드라마’를 연거푸 성공시켰다. 자사 보도에 쓴 소리를 하거나, 권력층이 민감해 하는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기자들은 KBS 밖에서 ‘조세피난처’, ‘원전 문제’, ‘정치인 검증’ 등 수준 높은 보도를 선보이며 활약 중이다.

탄탄한 취재 및 제작 노하우, 전 국민이 아는 KBS라는 브랜드, 타사 대비 준수한 환경 등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로라하는 기자와 PD들은 수년째 ‘제 발로’ 회사를 나간다. KBS가 ‘인력 유출’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해 속수무책 중이라는 지적이 나올 법하다.

나간 사람들이 말하는 KBS의 ‘한계’는…

그들은 왜 ‘든든한 품’을 스스로 벗어났을까. KBS를 떠나온 기자, PD들은 직종에 상관없이 ‘거대 방송사 KBS’에서 체감한 ‘갈증’과 ‘한계’를 입 모아 말해 왔다. 최소한 4년 전부터.

2012년 김인규 사장 퇴진 및 공정방송 쟁취를 걸고 진행한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이하 새 노조) 95일 파업에도 참가했던 나영석 PD는, 그 해 초 파격적인 승진 조건까지 거부하고 CJ E&M행을 택했다. 나영석 PD는 2013년 1월 이데일리 인터뷰(링크)에서 “주위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고 있었고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아졌다”면서 “지키기보다 두근거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어차피 (인생) 레이스는 길다”며 “영원한 안전망이 없다”고도 했다. 같은 해 12월 이투데이 인터뷰(링크)에서는 “특집 아니면 정규 편성에 국한되는 지상파 방송사에 비해 프로젝트를 비정기적으로 낼 수 있는 점이 제작자 입장에서는 유연하게 느껴진다”며 케이블 채널의 장점을 꼽기도 했다.

왼쪽부터 KBS 출신 신원호, 김원석, 나영석 PD (사진=CJ E&M)

그런가 하면 더 다양한 작품을 수용하지 못하는 지상파의 ‘좁은 풀’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미생> 방송 당시였던 2014년 뉴시스 인터뷰(링크)에서 김원석 PD는 현재 지상파 방송사에 대해 ‘로맨틱 코미디, 메디컬 드라마, 사극 이외의 장르 드라마는 만들기 힘든 시스템’이고,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고 진단한 바 있다. 신원호 PD도 <응답하라 1997> 종영 후 한 뉴스엔 인터뷰(링크)에서 리얼리티를 살리는 다소 과격한 대사나 성동일-이일화 부부의 애정행각 씬 등을 언급하며 “지상파였다면 많이 고민됐을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응답> 성공이 과대평가된 점이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지상파에서는) 어쩌면 편성 자체도 안 됐을 수 있다”고 전했다.

‘시청률’만을 최우선순위로 두어 새로운 시도를 위축시키는 환경 또한 ‘이직’의 이유가 됨 직하다. <불후의 명곡> 등을 연출한 조승욱 PD는 ‘착한 예능’을 표방한 <야행성>을 내놨지만, 저조한 시청률 때문에 급작스러운 ‘폐지’ 통보를 받아야 했다. 조승욱 PD는 2010년 텐아시아 인터뷰(링크)에서 “설령 처참하게 깨질지라도 제대로 한 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싸워보지도 못하고 링에서 내려오는 느낌이 가장 아쉽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공익 예능’은 자리를 잡을 때쯤 회사 결정에 따라 사라졌고, 조승욱 PD는 이듬해 종편 개국에 맞춰 JTBC로 이적해 <히든싱어>라는 프로그램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기자들이 체감하는 ‘답답함’도 못지않게 컸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심각해진 ‘언론 장악’을 견디다 못한 기자들은 ‘눈치 보지 않고 보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났다. 점점 언로가 막히고만 있는 지상파와 보도전문채널, 태생부터 일정한 ‘편향성’을 가지고 태어난 종편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언론사 연대파업이 일어났을 때 대안언론으로 시작한 탐사저널리즘 전문매체 <뉴스타파>에 해직 언론인이나 공정방송 투쟁에 몰두해 온 언론인들이 많은 이유다. 특히 김용진 전 탐사보도팀장을 비롯해 KBS 출신 기자들만 6명째 뉴스타파에 입성했다.

그래서 기자들은 ‘KBS 내에서의 한계’를 더 가감없이 표현했다. 탐사보도팀 해체, 지역 발령 등 고초를 겪은 후 2013년 2월 <뉴스타파> 대표로 간 김용진 전 KBS 탐사보도팀장은 그 해 3월 새 노조와의 인터뷰(링크)에서 “KBS에서 내 용도는 더 이상 없다고 판단돼 떠났다”고 잘라 말했다. 2012년 당시 MB정부의 ‘민간인 사찰 문건’을 폭로한 <리셋KBS 뉴스9>를 총괄했던 김경래 기자 역시 이듬해 7월 KBS를 퇴사하고 뉴스타파로 갔다. 그는 미디어스 인터뷰(링크)에서 “KBS 안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스스로를 소모시킨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일을 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영리 독립언론 뉴스타파로 이적한 KBS 출신 기자들. 왼쪽부터 김용진 전 KBS 탐사보도팀장, 김경래 전 새 노조 편집국장, 심인보 전 KBS기자협회 보도개입 진상조사단 간사 (사진=뉴스타파)

보도 및 인사개입 사실이 드러나 길환영 사장이 해임되는 잠깐의 ‘봄’을 경험했던 기자들에게도 ‘퇴사’의 물결은 계속됐다. 2014년 5월 당시 KBS기자협회에서 보도개입 진상조사단 간사를 맡았던 심인보 기자는 그 해 12월 퇴사 당시 인터뷰(링크)에서 “KBS 안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는 게 지금의 저로서는 기자로서의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는 길인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심인보 기자는 “당시 파업은 방송 정상화 목적도 있었지만 보도본부에서는 기자들의 여러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뉴스가 획기적으로 좋아졌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이해할 수 없는 ‘6개월 방송 연기 사태’를 겪고 반쪽 방송을 하게 된 KBS대기획 <훈장> 제작진 중 한 명인 최문호 기자도 미디어스 인터뷰(링크)에서 “내가 더 이상 KBS를 위해서 뭘 할 수 있는 부분이 없겠구나”라는 좌절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이어, “KBS가 공영방송이 아니고 ‘사유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거기에 대해 반론이나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워진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돈 핑계대고, 보복 보도로 대응하겠다는 KBS의 헛발질

그러나 KBS는 ‘인력 유출 사태’에 대해 엉뚱한 진단을 내리는가 하면 ‘보복성 보도’를 위한 TF를 구성하는 등 황당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KBS를 떠난 지금, ‘앞으로가 더 캄캄’해 보이는 이유다.

2013년 국정감사 때 ‘인력 유출’ 문제가 거론되자, “그 친구들(나간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만나서 말렸었다. 그런데 방송계 상업화 물결로 인해 공영방송보다는 개인적인 측면을 택했다”며 “다들 스카웃 비용이나 높은 보수를 받고 떠났다. KBS는 그 사람들을 붙잡을 만한 임금체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명한 길환영 당시 사장의 답변은, KBS 경영진들이 ‘이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프로그램의 매력과 강점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지 못하는 특수성, 시청률에 연연해 참신한 프로그램보다는 안전제일주의를 선호하는 환경 등이 한계로 지적됐지만 사측은 그저 ‘돈이 없어 그렇다’는 궁색한 핑계만 댔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KBS 상황은 녹록치 않다. ‘제작자율성’과 ‘보도공정성’ 침해는 기자, PD를 가리지 않고 KBS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일이며, 제작 실무자들과 간부들의 ‘원활한 소통’과 ‘자유로운 토론’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이 인력 유출에 대응하는 경영진의 태도는 더 ‘창조적’으로 변했다. 왜 KBS가 ‘인재가 자꾸만 떠나가는 회사가 되었는지’ 원인을 도출하고 알맞은 대응을 내놓기에 앞서 보복성 보도를 위한 TF를 만든 것이다. 지난 10일 새 노조는 사측이 함영훈, 전창근, 김진원 PD가 모두 JTBC행을 택한 것을 보고, ‘중앙일보, JTBC, 홍석현 회장’을 겨냥한 보도국 TF가 긴급 구성됐다고 폭로한 바 있다. 보도국 TF 탄생 배경은 간단했다. “우리 PD 빼 갔으니 조져”.

수년째 '탈 KBS'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KBS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디어스

말할 자유가 가장 활발히 보장되어야 할 언론사임에도, 보도국의 침묵을 경영진들이 앞장서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해 볼 문제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고대영 사장은 실무자 대표의 편집회의 발언권 보장 등이 포함된 현재의 편성규약을 개정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수많은 보도국 보직간부 사이에서 혼자인 기자협회장의 보도 제안은 ‘편집권 침해’로 둔갑됐고, 공정방송 감시활동을 주 업무로 하는 노조와 기자협회 소속 기자들은 징계를 받았다. 정부여당에 기우는 보도 행태도 개선되지 않는데,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마저 막아 설상가상인 지경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 개선하려고 하기보다는 더 억압적인 환경을 만들거나 나간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는 조직이, 이제 피할 수 없는 ‘탈 지상파’라는 거센 흐름을 버텨낼 수 있을까. 5년 동안 보여준 KBS의 ‘일관된 남 탓’을 봐서는 어두운 전망을 할 수밖에 없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