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네이버)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낸다”

경찰·검찰·국정원 등 수사기관으로부터 포털 등 전기통신사업자가 가입자 신상정보 제출을 요청받을 시 사실상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는 법원 판결이 나와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통신비밀의 보호) 3항은 “(수사기관이 가입자 정보를)요청하면 그 요청에 따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말뜻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대법원이 포털 등에 제공여부에 대한 심사의무를 지우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따지지 말고 제공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법원 민사1부(대법관 이인복)는 10일 오전 10시 차경윤 씨가 자신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한 네이버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 ‘파기환송’을 결정,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회피연아’ 동영상으로부터 시작된 사건…대법원, 2심 판결 뒤집고 네이버 손 들어줘

사건의 발단은 2010년에 발생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단 귀국 당시 유인촌 당시 문화부 장관이 김연아 선수를 환영하면서 두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자 이를 피하는 듯한 장면을 담은 이른바 ‘회피연아’ 동영상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대법원 민사1부(대법관 이인복)는 10일 차경윤 씨가 자신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한 네이버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 ‘파기환송’을 결정,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차경윤 씨는 기자들과 만나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미디어스

이 사건 원고 차경윤 씨는 ‘회피연아’를 자신이 가입돼 있던 네이버 카페에 게시했다. 문제는 유인촌 전 장관이 ‘회피연아’를 인터넷에 게시한 네티즌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벌어졌다. 네이버는 가입자 동의 등 별도의 절차 없이 경찰에 요청에 따라 차경윤 씨의 개인정보를 제공했다. 그 후, 차경윤 씨는 네이버가 개인정보자기결정권과 익명표현의 자유권을 침해당했다면서 네이버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전기통신사법> 상 수사기관의 개인정보 제공 요청을 따르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네이버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제공해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2012년 서울고등법원(2심)은 원고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네이버에 5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관련기사 : 네이버, 경찰에 개인정보 제공했다…손해배상)

하지만 대법원은 서울고등법원이 판결을 180도 뒤집었다. 대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네이버의 차경윤 씨에 대한 개인정보 제공이 “적법한 행위”라며 “위와 같은 통신자료 제공으로 인하여 피고(네이버)가 원고(차경윤)에 대해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전기통신사업자가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제공 요청에 응하여 통신자료를 제공한 것이 위법하다고 하기 위해서는,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제공 요청이 있을 때 전기통신사업자가 개별 사안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 그 제공 여부 등을 실질적으로 심사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되어야 할 것이나, 일반적으로 전기통신사업자에게 그러한 의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포털 등 전기통신사업자들은 제공 여부를 심사할 의무가 없다는 얘기다.

대법원은 또한 “(포털 등)전기통신사업자에 의하여 통신자료 제공에 관한 실질적인 심사가 행해질 경우 그 과정에서 혐의사실의 누설이나 그 밖에 별도의 사생활 침해 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더 크다”며 “수사기관의 권한 남용에 대한 통제는 국가나 해당 수사기관에 대하여 직접 이루어져야 함이 원칙임에도, 수사기관이 통신자료 제공을 요청하는 경우 전기통신사업자에게 실질적 심사의무를 인정하여 일반적으로 그 제공으로 인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국가나 해당 수사기관이 부담하여야 할 책임을 사인(私人)에게 전가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점 등을 고려하여, 전기통신사업자의 민사상 책임의 범위를 정한 것에 그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차경윤·참여연대 원고 측, “테러방지법의 위험성, 오늘 판결이 보여줬다”

이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 위축이라는 우려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혐의사실의 누설’ 등 수사기관의 주장을 법원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현행 “요청에 따를 수 있다”는 임의 규정에 강제력을 더해준 판결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포털 등 전기통신사업자의 경우, 대법원 판결에 따라 가입자 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 셈이다.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사건의 원고 차경윤 씨 “그동안 쌓아왔던 민주주의가 침식될 수 있을 것”이라며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 등)기본권이 이번 판결로 인해 침묵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인촌 전 장관에 명예훼손을 고소당한 네티즌은 저를 포함해 8명 정도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절대 사과 못한다’라고 했던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만큼, 소송 등은 시민사회 등 여론이 뒷받침해준다고 해도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회피연아’ 동영상을 봤고 재밌다고 생각해 올렸던 것이다. 그 속에 유인촌 전 장관에 대한 폄훼 및 비방글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개인 신상이 수사기관에 그대로 제공될 수 있다는 것은 문제(경찰은 차경윤 씨의 집으로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다. 네티즌들이 게시물 하나하나를 올리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행위를 할 때마다 자기 검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_차경윤 씨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박경신 교수는 "테러방지법이 가져올 위험성을 보여준 판결"이라고 비판했다ⓒ미디어스

문제는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 새롭게 제정된 테러방지법을 통해 문제가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참여연대 박경신 공익법센터 소장(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은 “테러방지법과 관련해 ‘<통신비밀보호법>을 따르도록 규정돼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옹호하는 분들이 있다”며 “그런데, 해당 법 조항(9조 3항)을 보면 사업자에 개인정보 위치 정보 요구권이 명시돼 있다. 그 조항이 가져올 위험성을 오늘 대법원이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경신 소장은 “<전기통신사업법> 상 ‘임의규정’으로 돼 있는 것을 포털 사업자들은 (사안의)경중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사기관의 요청에 기계적으로 가입자 정보를 제공해왔던 것”이라면서 “그 같은 상황이 테러방지법에서도 똑같이 재연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전기통신사업법>은 신상정보로만 규정이 돼 있지만 테러방지법은 요청할 수 있는 정보의 제한도 없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라는 얘기다. 이어, “현재 통신사업자들은 수사기관의 요청에 의해 가입자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포털 등 전기통신사업자들은 고등법원 판결(50만원 손해배상) 전후로 제공을 중단한 상태”라면서 “그런데, 오늘 판결로 인해 다시 통신자료를 제공하지 않을지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소송대리인단 박주민 변호사는 “수사기관이 요청하면 가입자 정보를 다 제공해야한다는 의미의 판결”이라면서 “더 심각한 것은 테러방지법에 여러 가지 개인정보에 대해 국정원이 요청할 수 있도록 돼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이 포털 등을 상대로 정보제공을 강제할 수 있기 때문에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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