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전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 대한 말이다. 여전히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3·1절에 대해 두산백과는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3·1절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걸 우리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 배웠다. 그런데, 3·1절을 기념하는 기념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이 반드시 핵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라는 대북메시지부터 쏟아냈다. 그 다음엔 국회를 겨냥했다. 테러방지법에 반대해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하는 상황을 “직무유기”로 규정했다.

3.1절 기념사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사진=연합뉴스)

지난해 말 한일 간 위안부 문제 협상이 타결되면서 ‘굴욕협상’이라는 논란이 불거졌다.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 불가역적인 해결’이라는 문구를 여러 가지로 악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던지면서 한일 간 위안부 합의의 기본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는 입은 여전히 닫혀 있다. 3·1절을 맞아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첫 3·1절…‘북핵’, ‘국회 비난’부터 쏟아낸 대통령

올해 개정된 한국 초등학교 6학년용 국정 사회교과서에 ‘위안부’와 ‘성노예’라는 표현 그리고 위안부 사진이 삭제되는 일이 발생했다. 정부는 이와 관련해 “초등학교 단계에서는 정서적 발육상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라고 해명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 같은 해명은 기존 역사교과서가 ‘아이들에게 패배의 역사를 가르친다’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과 맞아 떨어진다. 국정교과서에 대한 우려를 더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국정교과서는 현재 집필자를 비롯한 집필기준 등 기초적인 내용까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이번 3·1절 기념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최소한의 기대마저도 짓밟았다. 언론은 이와 관련한 아무런 문제의식을 보여주지 못했다. 방송뉴스들은 너나할 것도 없이 3·1절 기념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북핵 포기’와 ‘국회 직무유기’ 발언을 앵무새처럼 다시 전달하기 바빴다.

3월 1일 KBS '뉴스9' 리포트

KBS <뉴스9>는 1일 머리기사로 <박 대통령 “北, 핵 반드시 포기토록 할 것”>을 배치해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거의 그대로 전달했다. KBS는 “핵포기와 관계없는 대화를 위한 대화나 북한의 시간 벌기용 대화에는 결코 응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고 덧붙이는 친절함까지 선보였다.

마찬가지로 KBS는 <“일 위안부 합의 실천해야…국회 직무유기”> 리포트에서 다섯 문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일 메시지와 국회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전달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대통령의 자기 정당화와 국회를 향한 “직무유기”라는 비난 역시 그대로 소개됐다.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했던 발언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내용이다. 그 후, 일본정부의 기행은 정도를 더해갔고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여러 불만이 쏟아지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를 보도하는 KBS가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비판을 한 줄도 내놓지 않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일 최대 갈등 ‘위안부’·‘역사교과서’ 문제 피해간 지상파 뉴스

KBS는 뉴스 중반 이후 3·1절 관련 행사와 국내, 일본 반응에 대한 리포트를 배치했고, 거기에는 3·1절에 대한 의미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현재 한일 간 첨예한 갈등을 보이고 있는 ‘위안부문제’와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3월 1일 MBC '뉴스데스크' 리포트와 SBS '8뉴스' 리포트

MBC <뉴스데스크> 역시 <박근혜 대통령 "北 반드시 핵 포기하도록 만들 것"> 리포트를 머리기사로 배치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3·1절 연설과 거의 유사한 내용들로 단지 '전달'하는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SBS <8뉴스> 또한 다르지 않았다. SBS는 <박 대통령 "北, 반드시 핵 포기하게 만들 것"> 리포트에서 “(박근혜 대통령은)일본 문제는 간략하게 언급했다”면서 “지난해 한일 양국 간 위안부 합의가 이뤄진 것을 고려해 대일 비판 수위를 낮춘 것으로 보인다”는 해설을 덧붙였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한일 간 위안부 합의가 어떤 긍정적 의미를 가지는지 다루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해설을 덧붙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3월 1일 JTBC '뉴스룸' 리포트

3·1절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사를 들으며 귀를 의심했다. 그렇지만 이날 KBS 그리고 MBC·SBS 방송뉴스는 ‘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더 중요한 건 한국사회가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 이후 맞은 첫 3·1절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한일합의 무효화’를 촉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벌여졌다. 물론 이에 주목한 방송도 있었다. JTBC <뉴스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귀향>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지상파 뉴스를 보는 시청자들이야 말로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의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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