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성실 및 품위유지’ 위반이라며 공정방송 감시활동을 주 업무로 하고 있는 기자 둘을 징계한 것에 대해, KBS 내부에서 비판 성명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사 보도 비판을 이유로 징계를 강행한 KBS는, 기자들의 성명을 삭제하고 피케팅을 벌이는 노조 집행부를 끌어내며 공방위를 일방 거부하는 등 부당 징계를 철회하라는 목소리까지 억누르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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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사장 고대영)는 23일 인사위원회를 열고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성재호, 이하 새 노조) 공정방송추진위원회 전 간사인 정홍규 기자와 KBS기자협회(협회장 이병도) 공정방송국장을 맡고 있는 김준범 기자에게 각각 감봉 6개월과 견책이라는 징계를 내렸다. 정홍규 기자는 <서울 시내 교통마비에 논술 수험생 발 ‘동동’>(2015년 11월 14일), 김준범 기자는 <청년 대한민국 현장을 가다, 대륙 전역 배송>(2016년 1월 20일) 리포트의 보도 경위를 물은 것이 문제가 됐다. 사측은 두 기자가 취업규칙 제4조(성실), 제5조(품위유지)를 위반, ‘직장 내 질서’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 관련기사 : KBS, 보도 비판 기자들 ‘징계’…MBC 따라가나)

단체협약으로도 보장되어 있는 ‘공정방송 감시활동’을 ‘부당한 압력 행사’로 보고 징계를 내린 회사의 처사에 내부에서는 반발 목소리가 크다. KBS기자협회를 비롯한 사내 직능단체들이 연명 성명을 냈고, 젊은 기자들 중심으로 징계 철회 요구 성명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KBS 사측은 강경한 입장이다. 두 기자가 △압력 및 간섭을 행사했고 △소속 단체 이익을 위해 보도를 막으려 했으며 △단협과 편성규약에서 정한 공식절차를 따르지 않았기에 '징계절차는 적법했다'고 밝힌 KBS는, 나아가 ‘징계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을 삭제했고 노조의 공방위 개최를 거부했으며 노조 집행부의 피케팅을 저지했다.

기수별 성명 ‘봇물’… 사측, 성명 삭제·피케팅 저지·공방위 거부로 맞서

우선, 39기 기자들의 성명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39기 기자들 28명은 “믿을 수 없습니다, 선배 기자의 전화 한 통이 징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부끄럽습니다, 부당한 징계 앞에 무기력한 우리가. 절망합니다, 앞으로 논쟁이 사라질 회사의 미래에. 분노합니다, 징계의 칼날을 휘두르며 입을 막으려는 치졸함에”라는 짧은 성명을 사내 게시판에 올렸으나, 이 글은 현재 삭제된 상태다. KBS는 “성명서의 일부 내용이 <전자게시 관리지침>의 ‘게시금지 사항’에 해당돼 삭제 조치했다. 건전한 비판을 넘어 비방 수준이라는 판단”이라고 삭제 이유를 밝혔다. 39기 기자들은 향후 계획을 논의 중이다.

KBS 사측은 부당징계에 항의하는 새 노조 집행부의 피케팅을 막기도 했다. 6층 인사위원회장 앞에서 피케팅을 벌이던 성재호 본부장과 오태훈 부본부장은 KBS 청원경찰에 의해 끌려 나갔다. 또한 사측은 이번 징계 문제를 논의하자는 공정방송위원회도 일방 거부해 버렸다. 새 노조 관계자에 따르면 KBS 노사는 원래 오늘(26일) 정례 공정방송위원회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하려 했으나, 사측은 정확한 날짜도 제시하지 못한 채 ‘연기’를 요청했다. 결국 2월 내 공방위는 열리지 못했고 다음 달로 넘어가게 됐다.

정홍규, 김준범 기자에 대한 인사위원회가 열린 지난 23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집행부는 징계 시도에 항의하는 피케팅을 벌이다가 사측 청원경찰에 의해 끌려나갔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영상 캡처)

사측의 대응에도 내부 반발은 여전하다. 인사위가 열린 23일 전후로 29기, 30기, 31기, 34기, 38기 등 기수별 성명서는 계속되고 있다. 31기 기자 43명은 “후배와 선배, 평기자와 데스크 그리고 부장이 한 아이템을 놓고 한 자리에 모여 논쟁을 벌였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불과 10년 전 얘기다. 촌스러운 기자 사회였다. 그 촌스러움은 어느새 사라졌다”며 “촌스러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농담처럼 얘기했던 ‘공장’이 대신 자리 잡았다. 아주 세련된 공장이다. 아이템은 발주되고 하나하나가 자기 몫을 뚝딱거리며 만들어낸다. 사무실은 독서실이 되었고 선배와 후배의 심리적 거리는 멀어졌다. 소통은 옅어졌고 달라진 일터에 누군가는 익숙해지고 누군가는 체념했다. 기자는 사라지고 직장인들이 자리를 대신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내부에서의 견제는 우리 뉴스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다. 선배의 전화 한 통, 노사의 단체협약에 따른 공정방송위원회의 활동에 재갈을 물리는 이번 징계는 그래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징계의 수위는 문제가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망령이 우리 회사에도, 한때 대한민국 최고 언론사 보도국에도 들이닥치고 있는 것”이라며 “그 누구보다 KBS 기자다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기자에게 내려진 부당한 징계는 철회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34기 기자들은 “취재기자의 자율성은 취재원과 취재 대상자는 물론, 국장 이하 부장과 팀장, 여기에 더해 동료 기자들과의 자유롭고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확보된다. 외압 차단은 KBS 보도본부의 취재와 편집 방향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가려 하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 맞설 때 비로소 완성된다”며 “공방위 노조 측 위원의 활동을 문제 삼는 것은 노사 단체협약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기자협회 공정방송국장의 활동을 문제 삼는 것은 반론 없이 일사불란한 편집회의를 진행해 이견 제시에 귀를 막겠다는 의도로 비쳐질 뿐이다. 상식 이하의 징계위원회를 철회하라”고 밝혔다.

KBS 7개 직능단체, 언론노조 ‘징계 철회’ 한목소리

KBS 내 다수 직능단체도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KBS 7개 직능단체(경영·기자·방송기술인·방송그래픽·촬영감독·카메라감독·PD협회)는 <당신들의 양심에도 성실과 품위유지가 필요하다>는 성명을 내어 “기자협회의 공정방송국과 노조의 공방위는 보도의 문제점을 모니터링하고 비판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오랜 시간동안 노측은 물론이고 사측까지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왔다. 그런 조직의 실무자들이 보도의 사실 관계를 확인한 행위가 어찌하여 부당한 보도 개입인가”라고 밝혔다.

이어, “지금 KBS 보도국의 진짜 문제는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문화가 발붙일 틈이 없다는 점이다. 현장 기자들의 의견이 일상적으로 무시되고, 내부 비판의 통로가 모두 닫혀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소수의 간부가 일방적으로 아이템을 발주하고 보도의 방향을 정하는 행태가 문제”라며 “우리는 이번 징계를 보도국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내부 비판에까지 재갈을 물리기 위한 시도로 규정하고 당장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고 전했다.

전직 기자협회장 9명도 연명 성명을 내어 “언제부터 KBS가 이렇게 폐쇄적이고 독선적이고 권위적으로 변했단 말인가”라며 “(두 기자의 취재 활동을) 제작자율성 침해로 낙인찍는 것은 법과 노사관계를 거론하기 이전에 그토록 ‘소통’을 강조하던 보도본부 선배들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일갈했다.

이들은 “기자협회장이 부장단 회의에 참여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보도국 선후배들은 그 어떤 규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자 대표인 협회장의 회의 참석과 뉴스에 대한 제언을 서로 격려하고 경청해왔다”며 “김인영 보도본부장께서도 기자협회장을 역임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소통’을 강조하고 대화와 토론을 강조했었던 점을 후배들은 잘 기억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자기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인 징계안을 거둬들이고 후배 기자들과 소통에 나서라”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이번 징계 사태와 관련한 ‘보도본부 대토론회 개최’를 공식 요청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 이하 언론노조) 역시 성명을 내어 “‘공정방송’이라 불리는 언론의 정치적 독립과 중립은 진보-보수, 여야를 뛰어넘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공익적 가치다. 방송법에서 이를 명시하고 있고 법원도 ‘언론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판결하고 있다. 자본과 권력, 경영진의 개입과 침해로부터 이를 지켜내기 위한 ‘공정방송활동’은 언론사 노조의 결성 배경이고,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며 징계를 결정한 사측에 “공영방송 경영진의 권력을 향한 충성 경쟁이 눈물겹다”고 꼬집었다.

언론노조는 “고대영 사장은 보도책임자 재직시절 KBS의 공정성을 망친 대표적 인사로, 사장 후보에 오르자마자 내부 구성원들과 시민사회로부터 최악의 부적격 후보자로 꼽혔다. 급기야 청와대의 개입설까지 제기돼 정당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그러다보니 본인을 낙점한 권력의 요구에 부응해 직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에서 ‘징계 폭거’를 자행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수신료납부자이자 KBS의 주권자인 시청자 국민과 함께 청와대 청부사장을 반드시 심판하고 공영방송을 제 자리로 되돌려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정홍규, 김준범 기자는 23일 인사위 결과에 불복,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다. 1심 당사자는 2주 내로 재심 청구를 할 수 있으며, 재심으로 징계 결과가 최종 확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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