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시신을 처리해야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유태인 집단의 명칭은 ‘존더코만도’. 유태인들이 목욕을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면 존더코만도는 욕실에 들어간 유태인 동족이 걸어놓은 옷들을 재빨리 수거한다. 왜일까. 욕실에 들어간 유태인들은 목욕하기 위해 들어간 줄로만 알지만 욕실 안에서는 독가스가 살포된다. 이후 욕실에 갇힌 이들이 내뱉는 아우성이 욕실 곳곳에 울려 퍼지게 된다.

주인공 사울은 매일, 동족인 유태인이 욕실 안에서 죽어가는 걸 듣고 보아야만 한다. 단말마의 비명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이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욕실을 깨끗하게 해놔야만 독일군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누군가가 죽어야 나의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사울은 독가스가 가득 찬 욕실에서 운 좋게 간신히 살아난 소년을 발견한다.

▲ 영화 <사울의 아들> 스틸 이미지

하지만 소년을 기다리고 있던 건 독일군 장교의 장갑. 독일군 장교는 장갑 낀 손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소년의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문제는, 살아남았다가 이제 막 죽음을 맞이한 소년이 다른 이가 아니라 주인공 사울의 아들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영화에서라면 아들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대성통곡하겠지만, 사울은 그 흔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사울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일까. 사울이 매일 가스실에서 죽어간 동족의 시신을 처리하는 타나토스의 세계에서 살다 보니 아들의 죽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심정적으로 메말라서일지 모른다. 다른 하나는 인간성의 피폐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지만 독일군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들이 용변을 볼 때 식기에 일을 보게 했다고 한다. 자신이 밥을 먹는 식기에 큰 일을 보고, 다시 그 식기로 식사를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건 자연스레 휘발되고 말기에 독일군은 이런 점을 악용한 것이다.

유태인 사울이 아들의 죽음을 감정 없이 애도할 수 있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사울이 속한 존더코만도라는 집단이 사울 또는 유태인에 대한 감상주의적인 접근 방식에서 탈피했기 때문이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이나 드라마가 저지르기 쉬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주인공 주변에 있는 인물이 주인공에게 아주 쉽게 동화된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바라는 로맨스 또는 욕망을 성취해감에 있어, 주변 인물들이 주인공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조력자가 되어간다는 설정은 현실이 아니라 철저히 판타지다.

▲ 영화 <사울의 아들> 스틸 이미지

<사울의 아들>이 철저하게 리얼리즘으로 묘사되었음을 알 수 있는 점은 사울의 주변 인물이 사울이 아들을 매장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쉽게 동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은 자신의 유익이나 안위에 따라 움직이지, 타인의 욕망에 융화하기 어렵다. 만일 사울이 아들의 시신을 몰래 빼돌린 걸 독일군이 알아채는 날에는 사울 당사자는 물론 존더코만도 전체가 무사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사울의 주변 인물들은 사울의 욕망에 쉽게 동화하지 않을 뿐더러 사울의 욕망을 수시로 방해한다. 이러한 <사울의 아들> 속 리얼리즘은 영화가 <인생은 아름다워>와 대척점에 놓이도록 작용한다.

존더코만도 집단에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주인공 사울이 죽은 아들의 매장에 그토록 집착하는 건, 사울의 생물학적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다가 아니라 죽은 아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태인들의 표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기계적으로 동족의 시신을 처리하고 그들의 유품을 뒤져가며 값나가는 물품은 독일군 모르게 빼돌리던 존더코만도라는 집단 안에서는 동족에 대한 죄책감이나 연민이 휘발하고 상실된다.

하지만 사울이 그토록 아들의 매장에 집착하는 건 가스실 안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모든 유태인들의 아들이라는 심볼리즘을 통해 대신하여 속죄 받고 싶어 하는 심리, 또는 죽어간 유태인들에게 용서를 바라고자 하는 마음의 발현을 의미한다. <사울의 아들> 속 아들을 심볼리즘적인 알레고리로 읽는다면 이 영화는 유태인이라는 동족의 죽음에 자책감을 느끼지 못하던 사울이라는 개인의 각성기이자, 가스실에서 죽어간 동족에 대한 정신적인 헌화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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