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묵을수록 좋아지는 것은 된장이나 산삼만은 아니다. 기술 변화가 빠르고 트렌드에 민감한 게임 분야에서도 의외로 오래 묵을수록 감칠맛이 살아나는 분야가 있다. 바로 게임의 세계관이다.

단선적인 서사 흐름을 따라가는 책이나 영화와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의 개입과 상호작용에 따라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또 하나의 게임 안에서 여러 개의 서사가 동시에 진행되기도 한다. 플레이어의 입장과 행위의 결과가 아예 엔딩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끌고 가는 일도 부지기수다. 비록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게임은 다른 매체보다 이야기의 흐름이 갖는 유동성의 폭이 크다. 서사 자체보다 서사의 근간을 이루는 세계관의 탄탄함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고전 롤플레잉 게임의 대표작인 <울티마>는 1, 2, 3편까지를 통칭하는 엑소더스 3부작까지만 해도 ‘대악마에 맞서는 선악대립’이 중심인 게임이었지만, 4편에 들어서서 이른바 8대 미덕의 세계관이 정립하면서 깊이가 더해졌고, 여기서 갖춰진 설정은 훗날 <울티마 온라인>으로까지 이어졌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게임일 <워크래프트> 시리즈도 초반에는 단순히 인간과 오크의 대립으로 시작했지만,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두터워진 세계관은 30대의 녹색 오크인 ‘스랄’이라는 캐릭터를 숭배하는 플레이어들을 만들기까지도 했다.

탄탄한 세계관을 통해 매력을 발산하는 게임이 한두 개만은 아니겠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독창적인 자리를 차지하여 많은 게이머들로부터 사랑받는 게임 시리즈가 있다. 핵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미국을 배경으로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폴아웃> 시리즈다. ‘방사능 낙진’을 제목으로 건 만큼 황량하기 짝이 없는 세계에서 나름의 매력을 만들어 낸 <폴아웃> 시리즈도 어느새 이런저런 시간을 포함하면 30년이 넘어가는 세계관의 역사를 가진다. 그리고 그 최신작으로 2015년 11월에 출시된 <폴아웃 4>가 있다.

탄탄한 세계관의 아톰펑크 대체역사물

<폴아웃 4>의 시작 부분은 단란해 보이는 주인공의 가정이다. 화목하고 따뜻해 보이는 가정의 풍경은 게임 시작 20분만에 박살나는데, 텔레비전을 통해 핵폭탄 투하 뉴스가 긴급하게 터지면서부터다. 거대한 핵 방호시설인 ‘볼트Vault’로 대피한 주인공은 그러나 급속냉동 포드 안에서 갓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정체모를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되고, 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해 냉동 상태에서 200년만에 깨어난 주인공은 아이를 되찾고 아내(혹은 남편. 주인공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를 죽인 자를 찾아 복수하고자 폐허가 된 황무지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폴아웃 4>의 초반 핵폭발 장면. 핵방호시설인 ‘볼트’로 진입하기 직전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게임 내에서 주인공이 핵폭발을 목격하는 시기는 2077년 10월 23일 아침이다. 그리고 볼트 안에서 냉동수면 상태로 지내다가 다시 깨어나는 시점, 다시말해 프롤로그가 아닌 실질적으로 게임이 시작되는 시점은 2287년 10월 23일부터다. 그러려니 하고 플레이하면 되겠지만, 아마 <폴아웃> 시리즈를 처음으로 접해 보는 사람들은 게임 속의 여러 구성들을 살펴보면서 뭔지 모를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핵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프롤로그에서 보았던 핵전쟁 이전의 2077년도, 그리고 전쟁 후의 2200년대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폴아웃 4> 스크린샷. 군인들의 금속 갑옷 디자인과 배경 인물들의 복식을 살펴보면 우리가 아는 21세기 근처보다는 1960년대 느낌에 더 가깝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연도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언뜻 봐도 1950-60년대풍이 물씬 느껴지는 디자인 산물들로 게임 속의 2087년은 가득 차 있다. 가정용 로봇이 집안일을 다 처리해주는 수준인데 그 로봇의 디자인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형 디자인보다는 디젤펑크에 가까운 느낌이고, 심지어 2077년의 핵폭발 뉴스를 보도하는 텔레비전을 유심히 보면 흑백 TV임을 알 수 있다.

<폴아웃 4>의 2077년은 대체역사에서의 2077년으로, 실제 현실의 역사와는 다른 과정에 서 있다. 대략 제2차 세계전쟁까지는 현재 역사와 비슷하지만, 1960년대 이후부터는 많은 부분이 현실 역사와 갈라져서 흘러 온 것이 폴아웃 세계관에서의 역사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60년대에 50개 주가 13개의 커먼웰스라는 단위로 재편되었으며, 중국은 시장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면서 미국과 함께 대립각을 세우는 양강 체제의 중심이 되었다. 2077년의 핵전쟁 또한 자원 문제로 날카롭게 대립하던 두 나라가 2066년부터 벌인 전쟁 중 발생한 핵무기 발사로 인해 상호확증파괴가 작동하여 전 세계가 두 시간만에 멸망해버린 사건이었다.

폴아웃 세계관이 현실과 다른 점은 역사적 사건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게임 내에 등장하는 컴퓨터 비슷한 정보기기들을 살펴보면 진공관을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반도체나 정보기술 쪽의 발전이 아예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원자력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여 일반 자동차에도 소형 핵융합 엔진이 탑재되어 운행했음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른바 ‘아톰펑크’라고 불릴 만한 대체역사물이 <폴아웃> 시리즈의 세계관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은 상당히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고, 지금도 계속 보강되고 있다. 2015년에 출시된 4편이 2187년의 보스턴 근처를 다루고 있지만, 주인공이 볼트에서 냉동수면에 들어간 뒤 200여년 사이의 역사가 공백인 것은 아니다. 시리즈의 첫 작품인 <폴아웃 1>은 연표상 2161년에 캘리포니아 지역에서의 이야기를 다뤘고, 3D게임으로 거듭난 <폴아웃 3>은 2277년에 워싱턴 D.C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시공간이 다른 게임들이지만 동일한 세계관 속에서 하나로 묶여 대체역사물로서의 탄탄함을 상호 보완하고 있는 격이다.

게임에서 더욱 빛나는 세계관의 의미

장르물에서의 두터운 세계관은 비단 <폴아웃> 시리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는 루카스필름 시절의 세계관인 ‘레전드(구 EU)’와 디즈니 이후의 공식 세계관 ‘캐넌’을 갖추고 있고, 마블 코믹스는 자사의 캐릭터들이 활동할 수 있는 세계를 다중우주, 평행세계의 관념까지 끌어다 쓰면서 ‘마블 유니버스’라는 세계관으로 묶어 냈다. 판타지의 대표작 <반지의 제왕> 또한 ‘에아’ 속 ‘아르다’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의 정립이 있었다.

현실이 아닌 상상의 세계를 다루는 작품들이니 당연히 세계관과 설정의 충실성은 작품의 근간을 두텁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게임은 매체의 특수성 때문에 세계관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경향을 가진다. 이는 비단 PC게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른바 TRPG라고 불리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카드와 주사위 등을 통해 벌이는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들을 살펴 보면, ‘룰북’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가상의 세계에 대한 설정이 단지 역사와 지리, 신화와 같은 것 뿐 아니라 주요 신격, 전투의 방식과 선악의 구분까지도 파고들어 체계화된 룰북은 세계관의 개정마다 새로운 판본으로 ‘출간’된다. 가장 유명한 판타지 세계관인 <던전 앤 드래곤>은 세계관의 설정만을 발표하는 것으로도 출간이라는 표현을 쓴다. 세부 서사는 실제로 테이블에 모여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에 발생하지만, 서사의 배경이 되는 상상의 질료로서 룰북은 세계관 자체만으로도 출간의 의미를 지닌다.

소설이나 영화와 달리 게임은 그 정도를 막론하고 반드시 플레이어의 개입이 있어야 서사가 발생하거나 진행되는 구조를 가진다. 그냥 일직선상으로 흐르는 시간을 따라가면 자동으로 이야기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게임의 특성이다. TRPG의 경우 상상의 자유로움이 컴퓨터 게임에 비해 더 넓은 편이라 아예 이야기의 발생 자체가 플레이어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고, 컴퓨터 게임의 경우에도 플레이어의 개입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나 결과가 크게 바뀌는 구조일 경우 서사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면서 만들어지는 경향을 띤다.

<폴아웃 4> 또한 시리즈의 전통에 따라 플레이어의 자유도에 따른 이야기의 가변성에 신경을 많이 쓴 게임이다. 게임의 엔딩은 플레이어의 선택과 행동에 의해 변하며, 메인 스토리의 결과 뿐 아니라 해당 스토리에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나 세력들의 후일담 또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맞이한다.

<폴아웃 4>에서 아들을 찾아 황무지가 된 보스턴 일대를 헤매는 플레이어는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된다. 이 만남들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에는 물론 아들과 납치범을 찾아내는 ‘메인 스토리’에 해당하는 줄기도 있지만, 메인 스토리와는 무관하게 펼쳐지는 각각의 만남에 얽힌 이야기들도 사방에 흩뿌려져 있다. 미국 독립전쟁의 중심지였던 보스턴이 배경인 만큼 핵전쟁 이후의 질서 회복을 위해 다시 일어선 ‘미닛맨minuteman’ 그룹과 함께 커먼웰스의 부흥을 이끌어 볼 수도 있고, 전쟁 이전의 인기 히어로 만화 주인공이었던 ‘실버 슈라우드’의 코스프레를 좋아하는 덕후 친구를 도와 실버 슈라우드가 되어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에피소드도 체험할 수 있다.

▲서브퀘스트 중 하나인 ‘실버 슈라우드’ 코스프레를 위해 코스튬을 입은 주인공. 만화 속 히어로인 실버 슈라우드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정의의 히어로 연기를 하는데, 잘 보면 주인공 본인도 웃긴지 입꼬리가 살짝 찌그러진 채로 대사를 친다. 게임 내 사방에 이러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즐비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꼭 퀘스트를 통해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면서도 나름의 서사를 품은 경우도 넘쳐난다. 길거리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를 뒤져 발견한 메모 한 장에서 시작되는 개인의 슬픈 인생사도 있고, 폐허 속 단말기에 남겨진 누군가의 마지막 일기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아예 그런 서사도 없이 어떤 경우에는 그저 부둥켜 안고 죽은 듯한 해골 시체의 모습만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도 있다. 필수적으로 클리어해야 하는 퀘스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산재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어찌 보면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펼쳐질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모아 놓은 단편소설 모음집에 가까운 형태로 게이머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플레이어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들은 플레이어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다른 결과, 다른 이야기로 변한다. 누군가는 황무지 재건이라는 대의에 중점을 두면서 아들을 찾는 이야기를 겪을 것이고, 누군가는 걸걸한 입담으로 모두를 협박하며 오직 아들의 흔적에만 몰두하는 거친 부모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폴아웃 4>의 이야기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고, 다양한 선택에 따른 결과의 합리성을 부여하기 위한 <폴아웃>의 세계관은 고정된 서사를 다루는 다른 매체들보다 더욱 깊은 의미를 품는다.

4편이 새롭게 던지는 질문의 의미

<폴아웃 4>는 기존 시리즈가 가진 많은 점들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는 작품이다. 멀티 엔딩이나 다채로운 서브 퀘스트 같은 면은 동일하지만, 대화 선택지 등의 세부적인 선택의 폭이 기존보다 좁아졌다는 면에서는 실망하는 팬들도 많다.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가 많겠지만 좁은 코너에서 모두 다루기는 어려운데, 그 중 기존 시리즈와 두드러지게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메인 스토리다.

※여기서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해도 무방한 수준입니다.

기존의 폴아웃 시리즈에서는 이른바 멀티엔딩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선악의 구별이 가능한 부분이 존재했었다. 단적으로 주인공에게는 ‘카르마’라는 수치가 있어, 일반적으로 악행으로 여겨지는 언행을 할 경우 악 성향으로 바뀌고, 남을 돕거나 대가없이 일을 해주는 등의 선행은 카르마 수치를 선 성향으로 바꾸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선악의 판별이 수치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전작들은 그래서 누가 봐도 선악의 가치판단이 어렵지 않았다. <폴아웃: 뉴 베가스>에서는 황무지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부리고 오로지 힘과 폭력에 의해 규정되는 질서로 돌아가는 ‘시저의 군단’이라는 세력이 있다. 최종 엔딩에서 플레이어는 시저의 군단과 함께 할 수는 있지만, 이는 명확한 선악구분에 의해 ‘악 엔딩’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하지만 <폴아웃 4>는 일부러 선악의 구분을 대단히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폴아웃 4>에는 ‘신스’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일종의 인조인간인데, 1세대 신스는 겉으로 봐도 딱 기계인 티가 나는 반면 3세대부터는 아예 인간과는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한 상태다. 3세대 신스는 피부와 장기 같은 생체조직은 모두 인간과 동일하며, 식사와 소화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 부분까지 생물학적 인간의 것을 그대로 따른다. 게다가 감정을 가지고 있고 생존에의 본능이 행동에 영향을 주는 수준으로, 인간인지 신스인지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안드로이드다.

이 신스의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게임 내의 주요 세력들이 대립한다. 신스를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세력인 ‘인스티튜트’는 명백히 신스가 기계이며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부품이라고 주장한다. 간혹 감정과 본능에 의해 지시를 거부하거나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신스는 위험 상태로 간주되어 회수 후 프로그램을 리부트해야 한다는 것이 인스티튜트의 입장이다.

반면 ‘레일로드’라는 지하조직은 이러한 신스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신스는 인격적 측면에서 인간과 다를 바 없으며, 본능적으로 자유를 위해 탈출한 신스들을 몰래 빼내어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 레일로드다.

▲<폴아웃 4>의 여러 세력 중 하나인 ‘레일로드’의 보스 데스데모나.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세력은 ‘강철의 형제단’으로 불리는 조직이다. 이들은 핵전쟁의 발발로 몰락한 인류 문명의 전례를 되새기며 제어할 수 없는 기술이 불러오는 폐해에 집중하며, 신스 또한 핵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남용을 만들어 인류를 멸망시킬 것으로 판단한다. ‘강철의 형제단’은 신스를 만든 인스티튜트도, 신스를 인격체로 대우하려는 레일로드도 모두 날려버려야 인류가 인류답게 유지될 거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폴아웃 4>를 안해본 사람이라도 대충 여기까지를 읽었다면 생각나는 개념이 하나 있을 것이다. 게임 내의 신스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원작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 등장하는 인조인간 ‘레플리컨트’의 오마주다. 신스는 레플리컨트와 동일하게 인간과 쉽게 구별할 수 없고, 구별을 위해서는 별도의 테스트가 필요하며, 인간과 동일한 감정과 본능을 가지고 행동하고 마찬가지로 이식된 과거의 기억을 진짜 자신의 기억으로 알고 살아간다.

오마주의 대상인 레플리컨트는 <폴아웃 4>에서 한층 더 복잡해진 의미를 갖는다. 당장 신스 해방을 위해 활동하는 조직의 이름이 ‘레일로드’라는 점은 상기할 만하다. 노예제도 문제로 미국 남북이 갈등할 때, 남부의 흑인 노예를 빼돌려 캐나다나 북부 주로 보내는 실존했던 지하조직의 이름은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였다. 신스를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를 흑인 노예 문제와 엮어 풀어낸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대로 <폴아웃 4>에는 선악에 대한 가치판단이 수치적으로 매겨지는 시스템이 빠져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흑인 노예를 같은 인간으로 보느냐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해답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일한 감정을 지닌 기계가 등장한다면 당신은 어떨 것 같은가?”

<폴아웃 4>는 레플리컨트를 통해 던져졌던 질문을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수성을 통해 다시한번 되묻는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자세히 쓰지는 않지만, 게임은 게임의 특성을 살려 게임의 이야기에 깊이 개입해야 하는 플레이어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경험들을 제공한다. 플레이어의 판단에 따라 신스는 인간의 도구가 될 수도, 확장된 개념의 인간이 될 수도 있으며, 게임은 이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굳이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은 서사의 흐름을 만들기보다는 서사가 발생하는 조건인 세계관에 집중하는 게임의 특수성을 타고 더욱 강하게 플레이어를 파고든다. 정답이 없는 결말 앞에 플레이어는 오히려 고뇌할 것이다. 정해진 서사를 통해 제시된 소설과 영화에서의 레플리컨트 개념이 전하는 질문에 비해 세계관만 주어진 채 열린 흐름을 타야 하는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맞닥뜨려야 하는 신스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플레이어를 제3자로서의 대답이 아닌 당사자로서의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에 위치시키며, 같은 주제를 열린 서사로 변주할 수 있는 게임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언제나 강조하는 말이지만, 게임은 과정의 매체다. <스트리트파이터 2>의 최종 보스를 클리어해야만 그 게임의 재미를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굳이 엔딩의 결과가 어떤가를 생각하지 않아도 <폴아웃 4>가 준비한 여러 가지 질문에 플레이어가 당사자로서 대답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새로운 의미이고 재미다. 잘 짜여진 세계관의 한복판을 헤집고 다니며 수없이 조우하는 많은 상황들을 가장 재미있게 즐기려면 ‘빠르게 엔딩을 보자!’라는 자세보다는 느긋하고 꼼꼼하게 세계관의 구석구석을 훑어보는 느낌의 플레이가 효율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전통적 매체들이 제공할 수 없었던 당사자로서의 체험에 몰입해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게임 매체만이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철학적 희열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깨알 같은 재미 요소도 많다. 보스턴을 배경으로 하는 <폴아웃 4>의 생존자 도시 중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 구장인 팬웨이 파크를 개조한 ‘다이아몬드 시티’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린 몬스터’도 위 사진처럼 구경해볼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Play the Game>

#01- 비욘드 어스,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02- MMORPG의 장르적 특성과 워크래프트의 세계관 그리고 WOW

#03- 게임 속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04- 게임에도 정당해산 따위는 없다

#05- 스타크래프트, 윙코맨더3...우주를 다룬 최고의 게임은?

#06- 상호작용의 매체, 게임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07- 나의 삼국지는 그렇지 않아!

#08- 맞고만 치던 당신, 설날 고스톱 스코어는 얼마?

#09-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이야기, XCOM

#10- 새마을운동 게임으로 정신과 이념을 교육한다굽쇼?

#11- 시뮬레이션 게임의 개척자 <심시티>를 통해 본 게임의 재현력

#12- 캐쉬템의 문제, 게임 아이템은 소유 가능한 물건인가?

#13- 아이 위해 쓰여진 이야기 같은 게임, ‘LOOM’의 우화

#14- 천만 직장인의 웃픈 블랙코미디, ‘내 꿈은 정규직’

#15- 오락실의 유산① 게이머에 대한 편견의 시작을 찾아서

서평- <제국의 게임>, 게임으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사례

#16- 오락실의 유산② 동네고수에서 대도서관까지, ‘보는 게임’의 역사

#17- 오락실의 유산③ 한국 문화의 역사적 유물로서의 '오락실'

#18- 고립된 인간의 표정이 말하는 것들, 워킹데드

#19- 영화 ‘픽셀’, 영화로는 풀어내기 힘들었던 픽셀의 향수

#20- 게임이 무서운가? 근거 없는 게임 포비아 넘어서기

#21- 게임이 묻는다. 전쟁 앞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22- 성장하는 청춘들의 게임 라이프, ‘페르소나 4’

#23- 화성 테라포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UFO: afterlight

#24- 게임이 설계한 세계, 게이머가 창조한 세계

#25- 롤드컵 ‘국뽕’의 양조자를 위하여

#26- 게임탄압 대마왕의 축사, 어떻게 볼 것인가

#27- 마지막 스타크래프트가 우리사회에 던지는 시사

#28- 하루하루 살아내는 우리 삶 같은 게임, 굶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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