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 <캐롤>은 시대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아기자기한 소품과 고풍스러운 건물들, 그리고 Super 16 필름으로 찍은 거칠지만 따뜻한 화면의 질감이 눈에 띈다. 하지만 <캐롤>에서 이 모든 것은 캐롤과 테레즈 두 여자를 뒷받침해주는 배경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오로지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만 보인다. 세상에 모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뒤로하고, 오롯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하는 멜로영화는 실로 오랜만이다.

<캐롤>은 캐롤(케이트 블란쳇 분)과 테레즈(루니 마라 분), 두 여성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레즈비언의 사랑을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6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압델라티브 케시시 감독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연상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그랬듯, <캐롤> 또한 두 여자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이별의 아픔을 겪는 플롯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캐롤>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다른 질감을 보여주는 영화다. 201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펼쳐지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보편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과정에 충실했다면, 1950년대 미국 뉴욕의 시대상을 담은 <캐롤>은 두 주인공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본질을 담아내고자 한다.

▲ 영화 <캐롤> 포스터

<캐롤>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미국이다. 팀 버튼의 <빅 아이즈>(2014),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2015), 그리고 <캐롤>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1950년대 미국의 공기는 자유분방한 포장 속에 철저히 감춰진 억압이다. 당시는 냉전체제가 절정에 달했던 시대였고, 여자는 아무리 뛰어난 그림을 그려도 제값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의 이름을 빌려 그림을 팔아야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동성의 사랑은 당연히 용납되기 어려웠다. 사랑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고 여성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자에게 의존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캐롤은 그녀 자신과 세상 모든 여자들에게 금기시되어있던 규범을 깨고, 레즈비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여전히 캐롤을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그녀에게 행하는 전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 분)의 폭력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으며, 자신의 본모습을 인정하는 대신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을 포기해야만 했다.

▲ 영화 <캐롤> 스틸 이미지

반면, 일찍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실행에 옮기던 캐롤과 달리, 테레즈는 캐롤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 그리고 그녀 자신이 누구인지 눈을 뜨게 된다. 캐롤을 만나기 전부터 테레즈에게는 결혼을 구애하는 남자친구 리차드가 있었지만, 인생을 함께할 동반자로서 그에 대한 확신이 도무지 서지 않는다. 그럼에도 테레즈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점심메뉴 하나 결정하지 못하는 그녀의 우유부단함 혹은 결정장애 탓으로도 볼 수 있으나,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힌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없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강요하는 남자들과 대비되는 캐롤의 사랑

테레즈의 꿈은 사진작가다. 하지만 테레즈의 남자친구 리차드는 테레즈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주기보다, 테레즈와 함께 유럽 여행을 가고 결혼하는 것 외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테레즈가 리차드에게 그간 찍어놓은 사진들을 모아 포토폴리오를 만들어야겠다는 말을 건넸을 때에도 리차드의 머릿속에는 온통 테레즈와 유럽여행을 가는 것뿐이다. 리차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위해 유럽으로 가는 배편도 구했고 직장도 구했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하지만 테레즈의 대답은 분명했다. “난 원한 적 없어. 네가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

▲ 영화 <캐롤> 스틸 이미지

리차드는 테레즈를 사랑한다. 마찬가지로 캐롤과 이혼소송 중인 하지 또한 캐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놓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지는 딸을 미끼로, 캐롤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오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캐롤을 되찾기 위한 하지의 몸부림은 사랑을 빙자한 집착일 뿐이요, 서로에게 더 큰 상처만 남긴다. 상대방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정도차가 있긴 하지만, 하지 그리고 리차드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은 일방적인 강요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해서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하고 나만 바라봐야 한다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과 착각이 그들의 사랑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캐롤은 달랐다. 테레즈를 보자마자 한눈에 자신의 운명임을 직감한 캐롤은 그럼에도 캐롤에게 자신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 테레즈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이후에도, 테레즈를 대하는 캐롤의 태도는 한결같다. 무조건 사랑을 갈구하기보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파트너의 행복을 위해서 한 발 뒤로 물러날 줄 아는 캐롤의 용기와 결단력은 한번도 주체적인 삶을 살아 보지 못한 테레즈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뒤흔든다.

▲ 영화 <캐롤> 스틸 이미지

테레즈가 캐롤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 <캐롤>은 오랜 망설임과 고민 끝에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은 테레즈의 성장영화다. 그러나 테레즈가 자신과 똑같은 여자인 캐롤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인정하기까지, 캐롤 또한 테레즈와의 사랑을 위해 그녀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래서 <캐롤>은 테레즈가 캐롤을 사랑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캐롤이 테레즈를 사랑하는 영화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에 이끌렸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가시적인 혹은 보이지 않지만, 그녀들의 삶을 옥죄어 오는 수많은 시련을 견뎌야 했던 캐롤과 테레즈. 어렵게 지켜낸 두 여자의 사랑은 아름답고도 더할 나위 없이 숭고하게 다가온다. 운명처럼 다가온 그 눈빛을 묵묵히 따라가기로 한 그녀들의 사랑에 축복이 있기를. 사랑 이야기가 더 이상 흥미롭게 들려오지 않는 지금, 아직도 심장을 뛰게 하는 진짜 사랑 영화를 만난 것은 기적이자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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