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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몸 낮추기… ‘뒷북’ 되어버린 ‘특종’[기자수첩] 8개월 만에 ‘반쪽’ 방송된 KBS 대기획 <훈장> 시청하니
김수정 기자 | 승인 2016.02.04 23:55

얇은 여름옷이 낯설었다. 지난 2일 KBS 1TV <시사기획 창>을 통해 방송된 <훈장> 속 인물들은 종종 여름옷 차림으로 화면에 등장했다. <훈장>은 당초 지난해 6월 방송 편성이 잡혀 있었으나, 어떤 인터뷰를 넣고 빼라, 어떤 장면을 삭제해라, 이 표현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는 등 간부들이 ‘현미경 데스킹’을 고수하며 방송일자를 늦춰왔던 덕에 8개월이 지난 시점에야 시청자들 앞에 공개될 수 있었다.

   
▲ 2일 방송된 KBS <훈장>

<훈장> 2부작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어느 시기에 어떤 사람이 훈장을 받았는지를 분석하는 ‘대기획’이었다. 서훈 내역이 개인정보라며 공개를 거부하는 정부를 상대로, 제작진은 정보공개 청구소송을 걸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소송은 2015년 1월 마침내 제작진의 승소로 끝났다. 제작진은 정부가 공개한 약 66만 건의 기록과 자체 취재를 통해 얻은 6만 건을 더해 총 72만 건의 훈장 내역을 전수조사한 후, ‘간첩과 훈장’(1부), ‘친일과 훈장’(2부)이라는 큰 틀 아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부 ‘간첩과 훈장’은 지난해 6월 편성돼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메르스 사태 등으로 다른 방송들이 먼저 나갔다. 탐사제작부장과 시사제작국장은 이상하리만치 예민한 데스킹을 해 갔다. 제작진은 요구대로 기획안을 수차례 전달하고 5~6쪽 분량의 프로그램 요약본, 30쪽 분량의 가원고를 제출했으나 늘 ‘데스킹이 더 필요하다’는 답만이 돌아왔다. 3개월의 기다림 끝에, 제작진은 결국 <훈장>이 무사히 방송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호소문을 사내 게시판에 올려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데스킹 권한을 지닌 국·부장의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1부 ‘간첩과 훈장’의 경우 △무죄 사건은 전체 간첩 사건 중 극소수라는 점을 적시할 것 △무죄 사건이 모두 조작이 아니라는 것을 구분해서 적시할 것 △대공활동 전체에 대한 폄훼는 없어야 할 것 △최근 논란이 되고 있으니 한홍구 교수 인터뷰는 뺄 것 △국방부 반론을 더 넣을 것 등 다양했다. 어떤 수식도 없이 다만 ‘훈장’이라는 이름으로 나간 2일 방송에서 이 같은 사항은 모두 받아들여졌다. 그만큼 수많은 ‘가위질’과 ‘기워 넣기’ 과정이 반복됐다. KBS 한 관계자는 방송을 보고 “너덜너덜해졌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장기간 취재해 놓고도 ‘방송 최초’의 기회 스스로 저버린 KBS

긴 호흡으로 준비해 온 기획이니만큼 <훈장>은 장면 장면에서 꼼꼼한 취재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정부가 처음으로 공개한 서훈 자료 66만 건 중 41만 건은 ‘훈장 수여 사유’가 빠져 있을 만큼 그 내용이 부실했다. 채워져 있는 사유 역시 추상적이었고, 훈·포장 내역이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탐사보도팀은 방송 첫머리에서부터 훈장 수여 당시의 각 부처의 인사기록과 회의 기록 확인해, 정부가 애초부터 공개하지 않았던 6만 건까지 구체적인 공적 사유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 2일 방송된 KBS <훈장>

제작진은 1980년대 급증했던 재일동포 유학생 대상 간첩사건의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 로케를 감행했고, 다양한 취재원들을 만나 당시 자행됐던 인권유린 실태를 살펴봤다. 추정에 추정을 거쳐 진행된 간첩 조작 사건 사례를 통해 정부가 장려했던 ‘간첩 검거’의 허술함을 꼬집기도 했다.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은 피해자들의 애끓는 심정뿐 아니라, 인권유린 행태는 관행이었고 어쨌든 간에 자신의 ‘공로’로 받은 훈장을 반납할 생각은 없다는 고문관들의 입장도 균형 있게 반영됐다.

또한 불법 감금과 가혹행위로 ‘거짓 자백’을 받아 ‘만들어진 간첩사건’으로 적지 않은 이들이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고,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건에 대한 훈장이라면 ‘공적이 거짓인 경우(상훈법 제8조 서훈의 취소 사유 1항)’에 해당한다며 서훈 취소를 검토하겠다”는 국방부의 공식입장을 받아냈다.

하지만 <훈장> 내레이션에 이따금 등장하는 “최초”나 “새롭게 밝혀졌다”는 표현은 영 어색했다. 4일 전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일부 겹치는 내용이 먼저 방송됐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대한민국 훈장의 민낯’이라는 소재로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썼던 피해자들을 인터뷰하고, 재심에서 무죄가 사건에 관여된 공직자(대공수사관, 검사, 판사 등) 596명이 서훈을 받았다는 내용을 방송했다. 물론 ‘간첩’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한 <훈장>과 달리 <스포트라이트>는 각 정부별로 어떤 황당한 훈장이 수여되었는지, 현재 훈장 수여 기준과 방식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에 주목해 내용상 차이는 존재했다. 그러나 수십만 건의 훈장 자료를 분석한 내용을 ‘방송사 최초’로 보도한 곳이, ‘정보공개 청구 판결’을 받아냈고 먼저 취재에 들어갔던 KBS가 아니라 JTBC라는 점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또한 JTBC는 KBS에서 그렇게 몸 사렸던 ‘친일 인사’에 대한 내용도 일부 방송했다. 독도에 대해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던 A급 전범 일본 기시 노부스케 총리, “독도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나 국제법상으로도 명확하게 우리나라(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것이 일관된 입장”이라고 한 모리 요시로 등 극우 인사들이 우리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받았다고 보도한 것이다. 1, 2부 표기 없이 ‘훈장’ 1부 내용만 방송을 탄 데다, 2부 ‘친일과 훈장’ 방송은 기약이 없어진 상황인지라 KBS 취재진이 가진 ‘특종’의 의미는 더욱 빛이 바랬다.

   
▲ 지난달 29일 방송된 JTBC <스포트라이트>

왜 ‘특종’을 뒷북으로 만들었나

방송 연기의 단초가 된 2부 ‘친일과 훈장’은 친일 행적이 있는 인사에게 훈장을 가장 많이 주었던 시기를 다루었기에, 자연히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당시 이야기가 많았다. 제작진에 따르면 탐사제작부장 등이 2부 내용의 1/3 가량을 통째로 들어내라고 지시했는데, 하필 이 부분이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기시 노부스케 총리에게 보낸 친서 등 박정희 관련 내용이었다.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일은 더 있었다. <훈장> 제작진 4명 중 탐사보도팀장을 비롯한 3명이 교체됐다. 정기 인사가 나더라도 프로그램 작업을 완료할 때까지는 인사 시기를 늦추는 관행은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KBS노동조합-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양대 노조가 사태의 진상을 따져보기 위해 사측에 공정방송위원회 개최를 요청해도 사측은 ‘데스킹 중이라’, ‘연말이라 바빠서’ 등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러다 보니 <훈장> 제작진이 제기한 의혹을 ‘근거 없는 일방적 주장’이라고 일축한 사측의 해명은 쉬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방송이 미뤄진 8개월의 시간을 돌아볼 때,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인물의 껄끄러운 면을 건드리는 것이 눈치 보여 방송이 뚜렷한 이유 없이 미뤄지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게끔 만들고 이를 증폭시킨 것은 사측이었다.

지상파의 시사 프로그램이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팀’이라는 작은 단위긴 하지만 상시적인 탐사보도팀이 존재해 끈덕지게 파고들어야 하는 이슈를 간간이라도 다루는 곳은 KBS가 유일하다. 그런데 KBS는 상대적으로 준수한 환경과 역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취’를 스스로 저버렸다. 이제껏 공개되지 않았던 방대한 양의 자료를 토대로, 현대사를 관통하는 두 키워드 아래 공들여 씨줄과 날줄을 엮은 탐사제작물을 만들어 내고도 ‘최초 방송’의 기회를 타사에 넘겼다. 왜 기자들의 특종을 뒷북으로 만들었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김수정 기자  girlspeace@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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