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지만 이긴 버니 샌더스, 이겼지만 진 힐러리 클린턴…. 그런 평가도 있다. 어찌됐건 미국 대통령 선거가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는 건 맞는 얘기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아이오와주 민주당 코커스의 절묘한 결과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이야기를 보태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번 코커스에서 두 후보는 사실상 동률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의 아슬아슬한 승부를 펼쳤다. ‘힐러리 대세론’이 붕괴할 것인지를 지켜봐야 하고, 또 민주당 지지층이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아니면 움츠러드는지도 이후에 판단해봐야 한다.

벌써 일부에서는 ‘흥분하지 말라’,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주장도 내놓는다.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와 스페인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에 이어 버니 샌더스라는 진보의 ‘아이콘’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경계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다. 버니 샌더스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는 게 무슨 재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찌됐건 이 현상 자체에 대한 분석은 필요하다. 버니 샌더스의 성공에서 어떤 정치적 영감을 얻을 것인가, 그리고 그 영감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할 것인가는 여전히 우리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버니 샌더스처럼 하자’는 게 아니라 버니 샌더스의 예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 미국 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14일(현지시간) 버지니아 주 마나사스의 '프린스윌리엄 카운티 페어그라운드'에서 유세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선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건 조직을 이기는 유일한 수단이 ‘바람’이라는 것이다. 힐러리는 경선 초반에만 해도 자금과 조직으로 샌더스를 압도했다. 그러나 샌더스가 소액후원자를 대규모로 모집해 힐러리의 발끝까지 쫓아간 것은 상당한 의의를 가진다. 아직도 가능성은 낮지만 만일 샌더스가 대통령이 된다면 버락 오바마에 이어 두 번 연속 ‘바람’으로 조직을 꺾고 권좌를 거머쥐는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물론 조직을 이기는 바람이라는 건 사실 그냥 뻔한 얘기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바람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거다. 전형적인 공학적 분석틀로는 ‘언더독(Underdog) 효과’를 제시할 수 있다. 버니 샌더스는 스스로도 무(無)에서 출발했다고 자평할 만큼 비주류의 이미지가 강하다. 샌더스는 이 비주류 이미지를 버리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끌고 가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다. 네거티브 방식으로 선거를 치르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주장한 것도 언더독 효과를 강화시켰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한계가 있는데, 이런 언더독 효과를 누구나, 또 어느 경우에서나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버니 샌더스가 이런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지지자들이 그에게서 ‘정치적 신뢰’를 봤기 때문일 것이다. 냉소는 오늘날 진보정치의 가장 큰 적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보정치의 이상과 명분을 믿지 않는다. 그럴듯한 ‘썰’보다는 현실에 이득이 되는 ‘당근’을 제시하는 정치인을 보다 신뢰하기 마련이다. 멋있는 척 진보를 말하지만 뒤로는 온갖 추태와 음모를 꾸미는 게 오늘날 대중이 갖는 진보적 정치인의 전형이다. 불행히도 힐러리는 이메일 게이트를 비롯해 몇 가지 사건 때문에 이 함정에 빠졌다. 힐러리는 신뢰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능력은 있을 걸로 여겨지는 캐릭터의 전형이 되었다. 샌더스의 지지자들은 정확히 반대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들에게 샌더스는 자신을 꾸미고 내세우는 데는 젬병이지만 진중한 이상을 말하는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이다.

이 지지자들이 다른 정치인에게서는 찾아내지 못한 정치적 신뢰는 샌더스의 인생이 보증하고 있다. 샌더스는 30년 전부터 거의 같은 노선을 반복해서 얘기하고 있다. 자신이 믿고 지지하는 그 이상에 충실한 삶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이건 샌더스와 함께 지난해 ‘노인의 돌풍’을 불러 일으켰던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 동안 이상과 명분에 인생을 걸었던 이들의 캐릭터가 대중의 냉소를 뚫는 하나의 균열이 되었고 이게 바람으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그저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샌더스의 정치역정이 신뢰로 이어질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배경은 그가 시류에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데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소속으로 거의 기적적으로 벌링턴 시장에 당선된 이후 샌더스는 좋은 평가를 받으며 버몬트 주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이전에 공화당 색이 짙었던 버몬트 주의 유권자들은 그나마 샌더스와 친화력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민주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반이 있지 않았더라면 샌더스는 장기간의 외로운 중앙정치를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마지막에는 그가 내놓는 ‘메시지’가 있다. 불평등이 큰 사회적 문제인 이때에 대중에게 필요하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보통은 이런 좌편향적 발언들은 의심받거나 비웃음 당하기 일쑤지만 앞서 말한대로 그의 진지함으로 둘러싸인 정치인생은 냉소적 시선에 대한 가장 든든한 방패로 기능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가 ‘버니 샌더스가 시대를 따라잡은 게 아니라 시대가 그를 따라잡았다’는 평가를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가 백악관의 주인으로서 세계를 제대로 잘 통치할 것인지는 물론 의문이다. 우리는 이미 명분과 이상으로 집권했지만 통치에서 지지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해 결과적으로 통치에서 성공하지 못한 대통령들을 경험해왔다. 아니, 여전히 샌더스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러나 샌더스가 최소한 모범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어떤 자질을 보여줬다는 것은 분명히 평가할 지점이다. 자신이 내세우는 노선과 이상에 충실하면서 튼튼한 기반을 닦고 기다리다 때를 놓치지 않고 거병(?)하였다. 여기까지 만으로도 그는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힐러리가 대선후보가 되고 민주당이 정권을 재창출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샌더스의 지지자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회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권력을 쟁취하고 국가기구를 장악할 수 있는 치밀한 작전을 짜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사가 자기에 부여한 역할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양자는 모순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치인이 권력의지와 소명의식을 동시에 갖지 않으면 역사를 새로 써내려갈 수 없다. 최근까지 진보정치에서 화제가 된 정치인들은 보통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쯤에서 우리의 ‘야당’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샌더스처럼 입고 말하고 생각하자는 게 아니다. 노선과 명분의 한도에서 최대의 정치적 기예를 펼치고 역사의 심판을 받고자 하는 정치인을 본지 너무나 오래 되었다는 것이다. 노선으로서의 중도가 아닌 명분과 이상 자체를 버린 보따리장수 정치를 말하거나 아무런 노선이 없이 “정권교체를 하겠다”는 한 마디로 권력의지만 강조하는 정치인이 대다수다. 호남정치를 말하면서 호남이 가져다 준 정치적 과실에만 주목하지 호남을 어떻게 바꾸겠다거나 어느 방향으로 이끌겠다는 포부를 제대로 밝히는 세력도 없다. 모두를 깎아내리겠다는 게 아니라 이제는 달라지자는 얘기다. 이상과 명분, 노선을 갖고 최선을 다해 경쟁하는 정치문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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