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번호 13자리는 생년월일과 성별, 발급기관의 고유번호, 관할 지역에서 같은 성을 쓰는 사람 중 같은 날 태어난 출생신고 순서, 오류검증번호로 조합된다. 1900년대에 태어난 사람의 주민등록번호 뒷 번호는 숫자 ‘1’이 아니면 ‘2’로 시작한다. 1은 남성 그리고 2는 여성을 뜻한다.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의 주민번호 뒷자리 첫 숫자는 남성은 ‘3’, 여성은 ‘4’다. 그런데, 이 같은 조합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왜 남성은 1번이어야 하고 여성은 2번이어야 하는가’, ‘트랜스젠더와 제3의 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몇 번을 부여해야하는가’, ‘그것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굳이 성별 정보를 주민번호에 포함시켜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수자인권위원회,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진보네트워크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성소수자·인권단체들은 27일 오전 중구 삼일대로에 위치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주민등록번호 성별 표시는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주민등록번호 체계 변경에 있어서 성별번호를 삭제하고 임의번호를 도입해야 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진정인 중 한 명은 출생 시 주민등록상 남성(1)으로 지정됐으나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라 여성으로 생활하고 있는 중이다.

“주민등록번호에 포함하는 성별번호는 차별…역사적인 인권위 ‘진정’”

기자회견 사회를 본 진보네트워크센터 장여경 활동가는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주민등록번호가 도입된 지 40년 만에 번호체계 변화를 앞두고 있다”며 “그런데, 행정자치부는 주민등록번호를 새롭게 발급하면서 현 체제를 유지하고 끝의 두 자리만 바꾸겠다는 입장”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에 성별번호는 차별이고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임의번호를 지정해야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진정을 내게 됐다”고 기자회견의 취지를 설명했다.

▲ 여성·성소수자·인권단체들은 27일 오전 중구 삼일대로에 위치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주민등록번호 성별 표시는 차별입니다”라며 기자회견을 열고 진정서를 접수시켰다ⓒ미디어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류민희 변호사는 인권위원회 진정과 관련해 “주민등록번호의 문제점 중 생물학적 정보를 내제하는 문제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지적이 있었다”며 “이 가운데, 오늘(27일)은 성별번호를 표기하는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류민희 변호사는 “한국의 성평등지수가 세계경제포럼 지수에 의하면 114위 정도”라며 “우리는 국가가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자신의 성별번호를 노출하고 분류 당한다. 그것은 고정관념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성별번호 부여와 관련해 “첫 번째 문제는 성별에 따라 번호를 분류하는 것 자체는 성차별이라는 데 있다”며 “남성은 1번이고 여성은 2번이라는 홀수와 짝수로 구분되는데 이는 성 고정관념 국가를 조장하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 초등학교 출석번호를 정함에 있어서 남성에게 앞 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성차별이라고 권고한 바 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의미였다.

이미 많은 나라들이 차별적인 번호사용을 폐기하고 있다는 것이 류민희 변호사의 설명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13자리 국가식별번호 체계가 대표적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분리 정책 ‘아파르트레이트’에 따라 12번째 자리 중 숫자 ‘0’을 백인에게 부여하고 ‘1’은 케이프 컬러드, ‘2’는 말레이인, ‘3’은 그리콰인, ‘4’는 중국인, ‘5’는 인도인, ‘6’은 기타 아시아인, ‘7’은 기타 유색인 등으로 분류해 국가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사용돼 왔다. 류민희 변호사는 “국가·비국가행위자가 이에 기반한 차별을 행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며 “또한 이 번호체계 자체로 사회적인 불평등의 고정관념도 강화됐다. 결국, 1987년 폐지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고정관념에 기반한 성 차별적 주민번호가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류민희 변호사는 성별번호 부여의 두 번째 문제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침해를 꼽았다. 그는 “국가가 각 개인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는 그에 따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그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은 정당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인터넷 결제를 하는데 상대방이 내 성별을 알아야하는 이유는 도대체 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트렌스젠더, 주민등록번호 성별표시로 일상 용무 어려움 겪어”

성별번호 부여의 세 번째 문제로 류민희 변호사는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그는 “트랜스젠더는 사회적 성과 주민번호상 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며 “그런 트랜스젠더들은 은행 등의 용무를 보면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는 4월이면 총선에서도 트랜스젠더들은 성별번호가 포함된 주민등록증을 사용해야 한다. 1과 2라고 적시돼 있는 성별번호와 사회적 성에 의해 투표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5년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실제 트랜스젠더 응답자 90명 중 60명(66.7%)이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해야하는 용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부담감을 느낀다”고 답변한 바 있다. 그로 인해 선거와 투표 참여를 포기한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 또한 22명(36.7%)나 됐다.

류민희 변호사는 “성별번호는 인터섹스에 대한 차별이며 행복추구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인터섹스는 총괄어로서 호르몬, 성선, 성염색체 상의 이유로 어느 한쪽의 성별에 들어맞지 않는 성해부학적 신체를 가진 사람을 뜻한다”며 “이 같은 이들에게 젠더이분법적인 성별 표기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래서 독일에서는 출생증명서에 ‘제3의 성’의 선택지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주민등록번호 상 이분법적인 성별번호는 그 자체로 문제라는 비판이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이종걸 사무국장 또한 “행정자치부에 의한 강제적 성별 이원체계는 인권침해”라면서 “주민등록번호에서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한국사회 내 성차별 요소를 줄여줄 것이다. 그 자체로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진 못하더라도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주민등록번호는 전면 개편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들 단체들은 28일(내일) 오전10시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주민등록번호제, 어떻게 개편할 것인가?>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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