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은 바뀔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사극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육룡이 나르샤> 역시 약점을 가진 채 이야기를 풀어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조선 건국에 대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 닳고 닳은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익숙하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재미;
이방원의 재해석을 가능케 하는 작가의 힘, 이성계 위기가 곧 조선 건국을 부추겼다

정몽주를 제거해야 하는 이유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있어도 사직만은 바꿀 수 없다는 포은의 강직함은 결국 모든 것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정도전이 꿈꾸는 세상을 고려에서 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이룰 수 없는 이상은 결코 만들어져서는 안 되는 세상이었다.

완벽하게 구축된 정도전의 개혁 방안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정도전이 그렇게 완벽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리란 확신을 가진 정몽주는 정도전을 죽이지 않는 한 결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몽주는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유자로서 할 수 없는 술수까지 부리며 고려를 지키려 했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삼봉에게 죽이겠다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포은에겐 오직 사직을 지키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삼봉만이 아니라 이성계와 그 모든 이들을 죽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려라는 나라를 결코 잃을 수 없다는 포은의 그 생각은 결국 그 어떤 개혁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으면 천출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포은의 이야기는 그래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삼봉의 유배가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한 이방원. 그가 포은을 찾아가 따지는 과정에서 포은은 힘이 없으면 진실과 상관없는 거짓이 진실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포은의 모략은 치밀했다. 이성계와 공양왕이 은밀하게 만난 자리에서 포은은 삼봉을 잠시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하기로 약조했다. 도당회의에 참석하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피했던 이성계는 너무 순진했다. 이성계가 자리를 피한 상황에서 포은은 완벽한 모략으로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추진했다.

삼봉을 곧바로 유배지로 보내버린 포은은 이성계가 돌아오기 전 모든 것을 끝내야만 했다. 유배를 갔던 권문세족들과 이색까지 복권시키며 과거의 고려로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포은은 다시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절에 다녀온 후 삼봉이 유배를 갔다는 사실에 분노한 이성계는 포은을 찾아가 칼을 겨누며 삼봉을 다시 데려오라 명한다. 하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활을 되돌릴 수 없는 포은은 칼이 목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삼봉이 죽게 되면 고려를 멸하겠다는 이성계의 말에도 포은은 흔들리지 않았다.

"삼봉이 죽는 날이 고려가 망하는 날이라 하셨지만, 제가 지금 죽어도 고려는 망합니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이성계가 왕권을 무력으로 찬탈할 정도는 아니라는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성계는 분노하기는 했지만 정몽주의 말처럼 무력으로 권력을 가지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긴박한 상황에 사냥을 선택한 이성계와 그를 노리는 무리들로 인해 이성계는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

무명은 이 기회에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아이들을 이용해 무극이 되기를 독려했던 육산. 그런 육산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무극은 이성계를 제거하고 안정을 되찾은 후 육산을 제거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길선미에게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성계는 의외의 상황에서 낙마하고 만다.

토지개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권문세족 중 하나인 조상원은 이성계를 노리다 화살을 쐈다. 길선미와 운명적인 대립을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말의 갈기를 건드린 화살로 인해 이성계는 낙마해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성계의 낙마는 결국 고려 멸망의 이유가 된다. 이성계가 낙마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포은은 이것은 천운이라고 확신했다. 이 상황에서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확신한 포은은 강력하게 이들에게 칼을 꺼내들었다.

조준을 비롯한 이성계 측의 인사들을 모두 제거해버린 포은은 그것도 모자라 이성계까지 제거하기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양왕은 오히려 불안해했다. 만약 이성계가 죽지 않고 개경으로 돌아온다면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곁에 있던 윤랑은 척사광이 되어 자신이 이성계를 제거하겠다고 나선다.

전설의 무사 척사광까지 나선 상황에서 이성계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부상을 당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 최소한의 인원으로 벽란도에 있는 이성계는 목숨조차 위태로웠다. 이성계의 측근 인사들까지 모두 제거되고 권력을 틀어쥔 포은으로 인해 이성계의 목숨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남은 조직을 이용해 백척간두 상황을 바꿔야만 했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어떤 방법으로든 이성계를 개경으로 데려와야만 했다. 이성계가 있는 벽란도로 향한 이방원은 두 개의 가마를 이용해 포위하고 있는 적들을 분산시킨 후 수레에 아버지인 이성계를 데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성계로 인해 두려움에 떠는 공양왕을 두고 볼 수 없어 스스로 척사광이 된 윤랑은 무휼이 있는 가마를 친다.

오직 이성계만 죽이면 되는 이 싸움에서 척사광은 칼등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키고 가마만을 노렸다. 두 동강이 난 가마 안에 누군가 있었다면 순식간에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척사광의 무술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예였다. 무휼마저 간단하게 제압하는 척사광을 무너트릴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이방지 외에는 없게 되었다.

"역시 백성들은 위대하네"

위태로운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 백성들을 보면서 이방원이 읊조리듯 내뱉은 이 발언은 흥미롭다. 우왕좌왕하던 이방원은 직관적인 백성들의 행동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머리로만 생각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달은 이방원은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포은이 모든 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측한 이방원은 이를 막기 위해서는 오직 이성계를 안정하게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없다고 확신했다. 이성계를 막느냐 지키느냐가, 고려를 지킬 수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나라의 시작인지를 결정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이후 이방원은 아버지를 찾은 포은을 제거했다. 포은을 죽이지 않는 한 대업을 달성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이방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정도전이 그토록 설득해왔던 일을 다시 한 이방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포은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죽이지 않으면 대업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은 결국 피를 불렀고, 고려는 망했다.

이상에 빠진 채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정도전과 자신들을 탓하며 무혈 혁명은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고 자책하는 이방원. 부상으로 몸이 쇠약해진 이성계는 태조 왕건이 꿈에 등장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우아한 개혁은 존재할 수 없다며 자신들의 일은 바로 '패업覇業'이라고 확신한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인의를 무시하고 무력과 권모술수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곧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대업이라고 정의한 이방원의 이 발언은 이후 벌어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일들의 단초가 된다. 정도전이 외친 그 엄청난 과업은 순수한 이상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포은의 행동으로 증명되었다. 평생을 강직한 유자로 살아왔던 그가 이렇게 권모술수를 부리면서까지 권력에 집착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란 더러운 피냄새를 풍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이성계. 무혈 혁명은 존재할 수 없다며 대업이 아닌 패업이라고 확신한 이방원. 그들의 분노는 현재의 우리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다. 정치란 착하고 완벽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덜 나쁜 놈을 선택해 국민들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니 말이다.

역사에 기록된 내용은 변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기록되지 않은 그 빈틈 속에 작가의 상상력은 가득 채워진다. 작가의 상상력이 곧 사극의 재미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육룡이 나르샤>는 대단한 능력을 갖춘 작가의 힘이 느껴지는 드라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마저 긴장하며 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이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밀리는 쪽이 죽을 수밖에 없는 잔인한 권력 다툼 속에서 포은은 이길 수 없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지략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이방원은 대유자 포은을 죽였다. 낭만만 가득했던 어른들과 달리 현실을 직시한 이방원은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사회적 변화를 이끌 묘수가 절실한 현재는 고려 말 그때와 너무 닮았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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