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단서가 없을 때 취조실은 형사와 용의자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다. 흔히 보는 고성과 과한 액션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범인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형사들의 수법이겠지만 공소시효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는 먹히지 않을 수단이다. 15년간 미제사건이었던, 끝까지 경찰을 농락하는 여유까지 부렸던 범인이라면 그 전쟁은 오히려 조용하고, 결정적 한 마디를 위한 더 긴장된 심리전이 오가기 마련이다.

현실은 몰라도 드라마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시그널> 역시 그랬다. 공소시효를 고작 20분 남겨 놓고 유괴살인사건의 진범을 잡았으나 당장 기소할 수는 없었고, 최소한 범인의 자백이라도 필요했다. 그래서 노련한 강력반 형사 차수현(김혜수)는 아주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범인 윤수아(오연아)를 취조해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희생자의 안경에서 나온 DNA로 증거를 확보했다고 거짓말로 윤수아의 자백을 끌어내려고 했다.

▲ tvN 새 금토드라마 <시그널>

그러나 윤수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밖에서 지켜보는 동료 형사들조차 믿을 법한 진지한 유도심문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박해영(이제훈)이 가짜 국과수 서류까지 들고 들어가 소리를 질러도 속지를 않았다. 윤수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차수현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완전범죄를 자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소시효가 만료되자 윤수아는 유유히 취조실을 걸어 나갔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여기서 이대로 윤수아를 내보내게 된다면 <시그널>은 실패다. 아무리 리얼리티도 좋지만 이런 악질 범인이 자유를 얻게 된다면 형사 드라마의 근본이 깨지는 일이다. 과연 어떤 전개가 기다리고 있을까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그때 감식반 형사가 증거 하나를 차수현에게 건넸다. 죽은 서영준(윤수아에게 살해당한 피해자)의 옷에서 검출된 사건당일의 주차권이었다.

이 긴박한 순간에 웬 주차권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 주차권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극적으로 돌파케 하는 특급 티켓이었다. 시체가 발굴되었어도 일단 경찰은 서영준의 사망을 납치살해된 김윤정과 동일한 날짜로 추정하여 같은 공소시효를 적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견된 주차권의 날짜는 그보다 하루 뒤였다. 윤수아의 완전범죄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 tvN 새 금토드라마 <시그널>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윤수아의 범죄를 깨뜨렸지만 끝내 살해당한 김윤정에 대한 납치, 살해는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는 점이다. 여전히 김윤정 납치에 대한 공소시효를 변경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점이 가슴 아픈 일이지만 반대로 대단히 절묘한 장치였다. 범인은 잡았지만 사건은 해결하지 못한 현실. 다시 말해서 공소시효에 대한 의문과 분노를 자극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그널>의 안방 장기미제사건전담반이 차려지게 된다. 물론 이는 여론에 쫓겨서 경찰이 전시용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용 미제사건전담반이 어떻게 될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 부분만은 매번 참신한 김은희 작가도 다소 고루한 밥상을 차리고 말았지만, 그것은 이 드라마가 경찰에 대한 맹목적인 호감으로 가지 않기 위한 거리유지용 설정일 것이다. 예컨대, 전담반이 사건들을 줄줄이 해결해나가도 그것은 경찰의 공로가 아니라는 정도.

잠깐 이야기가 샜지만 어쨌든 사건은 해결됐지만 끝까지 시청자로 하여금 공포와 분노에 떨게 한 범인 윤수아에 대한 칭송(?)을 좀 더 하지 않을 수 없다. 김혜수와 이제훈이 몰아붙인 취조실에서도 끄떡하지 않은 이 철의 심장을 가진 범인 윤수아의 연기가 너무도 돋보였기 때문이다. 상냥한 표정과 독기 품은 표정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모습이 하도 현란하게 변화해서 마치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하나 싶을 정도였다.

▲ tvN 새 금토드라마 <시그널>

<시그널>은 첫 회부터 대단히 화제가 됐는데, 김혜수, 이제훈의 잘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쩌면 이 드라마의 긴장과 공포 분위기를 잡아준 일등공로는 바로 이 윤수아 아니 배우 오연아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록 단역에 불과하지만 해낸 역할은 주연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체포된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순전히 희박한 짐작이지만 윤수아는 앞으로도 간간히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김혜수가 복역 중인 오연아를 찾는 장면에서 그 힌트와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어차피 차수현과 박해영은 미제사건들을 쫓는 동시에 갑자기 사라진 15년 전의 형사 이재한(조진웅)도 찾아야 한다. 그 긴 미로찾기에 역시나 윤수아의 역할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과연 오연아가 단역으로 끝이 날지 아니면 미제전담팀의 또 다른 의미의 조력자로 다시 등장할지도 기다려 봄직하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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