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주인공인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백인이면서도 ‘자이니치’의 정서를 환기토록 만드는 경계인으로서의 백인으로 자리매김한다.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 분)는 휴 글래스의 아들을 부를 때 ‘혼혈’ 또는 ‘잡종’이라고 부른다. 백인인 휴 글래스의 아들을 이렇게 부르는 건 휴 글래스가 <라스트 모히칸>의 호크아이(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처럼 백인 여성과 결혼한 게 아니라 인디언 원주민 여성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라스트 모히칸> 혹은 <늑대와 춤을>의 백인 주인공은 배우자를 택할 때 같은 피인 백인 배우자를 택하고 인디언의 문명으로 포섭된다. 앵글로 색슨이 건설하는 유럽 방식의 문명권을 저버릴지언정 배우자를 택할 때에는 인디언이 아닌 백인으로 정한 셈이다. 하지만 휴 글래스는 다르다. 백인이 인디언 문명에 포섭되면서 배우자 역시 백인이 아닌 현지 여성을 택함으로 <라스트 모히칸>과 <늑대와 춤을> 속 주인공과는 구분되는 행보를 걷는다.

▲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스틸 이미지
어쩌면 휴 글래스가 존 피츠제럴드의 손에 아들을 잃는 운명은 예견되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존 피츠제럴드를 ‘순혈주의자’로 본다. 만일 휴 글래스가 배우자를 택할 당시 인디언이 아닌 백인을 택했다면 휴 글래스의 아들은 잡종이라는 모멸감 섞인 조롱을 당하지 않았을 테고, 존 피츠제럴드라는 백인이 같은 백인을 살상할 확률도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휴 글래스와 존 피츠제럴드의 갈등은, 죽어가는 휴 글래스가 숨이 끊어지기 이전까지 참지 못한 존 피츠제럴드의 조급함을 넘어서서 물질만능주의를 추구하던 존 피츠제럴드의 탐욕이 빚은 결과이자 동시에 휴 글래스의 아들이라는 ‘혼혈’을 용인하지 못한 순혈주의자 존 피츠제럴드의 옹졸함이 초래한 참극으로 볼 수 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얼핏 보면 <라스트 모히칸>과 유사한 듯하면서도 다른 궤를 견지한다. 그것은 ‘호전적인 인디언’이라는 공통점을 두 영화가 안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듯 보인다. <라스트 모히칸>에서 백인을 공격하는 마구아(웨스 스투디 분)를 보라. 두 영화에서 인디언은 백인을 공격하는 호전적인 인디언으로 묘사된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역시 인디언 아리카라 족이 모피 사냥꾼인 백인을 무차별 공격하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스틸 이미지
하지만 아리카라 족 인디언이 백인에게 반감을 갖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백인의 ‘악행’ 때문이다. 아리카라 족이 본래 호전적인 인디언이기 때문이 아니라, 백인의 악행이 먼저 있었기에 인디언이 백인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옳다.

곰의 습격에서 벗어난 휴 글래스에게 아메리카들소의 내장으로 허기를 달래게 만들어준 인디언이 백인에게 어떤 행보를 겪는가를 관찰한다면, 인디언이 아무 이유 없이 백인을 적대적(敵對的)으로 대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가운데서 인디언이 백인을 공격하는 까닭은 인디언이 호전적이어서가 아니다. 인디언을 자극하게 만든 백인의 악행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은 백인들이 인디언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우했는가를 바라보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버전 4,000km의 ‘다이 하드’이면서 동시에 ‘백인 만행 고발사’로 읽어볼 수 있는 영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마지막에 남긴 “복수는 신의 일”이라는 대사를 곱씹어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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