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 문이 열리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언론인으로서 20~30년 넘게 일해 온 이들이 그 경력을 밑거름으로 해 정치인으로 데뷔하는 것은 이미 흔한 ‘코스’다. 당장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로 직행한 언론인들을 따져 봐도 다섯 손가락이 모자란다. 김성우 SBS 기획본부장, 민경욱 KBS 보도국 문화부장, 윤두현 YTN플러스 사장, 이남기 SBS 미디어홀딩스 사장, 정연국 MBC 시사제작국장 등 특히 방송계 인사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오전에는 방송사 기자였다가 오후에는 청와대 대변인이 되는 촌극이 두 번(민경욱, 정연국)이나 일어났지만, 당사자들 누구도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현직 언론인들을 권력 핵심부인 청와대로 들이는 일이 너무 자주 반복되다 보니 ‘그러려니’ 하는 정서만 짙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언론계를 청와대 인력공급처로 생각하나”(링크)라는 일갈이 나왔을까.

문제는 다소나마 욕을 먹으면서 데뷔를 했는데 일이 잘 안 되는(?) 경우다. 청와대로 들어가는 순간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외피를 바꾸게 되고, 그런 만큼 관련 커리어를 계속 쌓아가야 하는데 갑자기 공백기를 맞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YTN 출신 윤두현 전 홍보수석이 몸은 언론계에 있지만 마음은 정치권에 가 있는 이들에게 모범답안을 보여줬다. 다시 언론계로 돌아갔다가 선거에 시기에 맞춰 그만두면 된다. 그는 경질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케이블협회장으로 '컴백'했고, 8개월 만에 다시 사의를 표명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올해 4월 총선 출마’를 하겠다는 거였다.

갈 곳 잃은 정치 낭인 받아주는 언론계의 관대함

6일 주주총회에서 이준용 전 KBS 충주방송국장이 KBS N 사장으로 임명됐다. KBS 내부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준용 사장은 KBS N을 이끌고 갈 전문성을 갖춘 인사가 아니다. ‘KBS 가치를 바탕으로 콘텐츠 소비자에게 최고의 만족과 경험을 제공하는 미디어 전문기업으로서 드라마, 엔터테인먼트, 여성전문채널, 어린이, 교양정보 등의 채널을 운영’하는 KBS N은 ‘스포츠’를 주 분야로 하는 곳인데, 정작 총책임을 맡아야 할 그는 스포츠나 스포츠 행정 부문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그는 결정적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당적을 갖고 충청남도 당진시장에 출마한 예비후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준용 사장은 공천을 받은 최종 후보였던 이철환 씨를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표현대로 그가 “정치권을 기웃거리던” 사실은, 높은 공적책임을 지니는 공영방송 KBS 그룹에 포함돼 있는 계열사의 대표가 되는 데 어떤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윤두현 전 수석이 언론인 경력을 바탕으로 정계 진출→언론계 복귀→다시 정계 진출이라는 3단계 과정을 거쳤다면, 이준용 신임 사장은 2단계쯤 와 있는 셈이다. 종편 MBN 앵커로 복귀한 김은혜 전 대변인, 유정현 전 새누리당 의원도 비슷한 케이스로 볼 수 있다.

최근 15~20년 사이, 정치권 경력을 훈장 삼아 KBS 본사 및 계열사에서 요직을 맡은 사례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이준용 사장은 이례적인 케이스다. 또한 이번 인사는 지난 2014년 개정된 방송법 취지를 거스르는 처사이기도 하다. MB 정권 이후 권력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이 KBS, MBC, YTN 등에 내려온 이후, 언론계 안팎에서는 최소한 ‘특보 사장’은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방송법은 방송 책임자의 ‘정치적 중립성 의무 요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됐기 때문이다.

정당법 제22조에 따라 당원 혹은 당원 신분을 상실한 날로부터 3년이 되지 않은 자, 공직선거법 제2조에 따른 선거에 의해 취임하는 공직에서 퇴직한 날부터 3년이 되지 않은 자, 같은 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 당선을 위해 방송·통신·법률·경영 등에 대해 자문이나 고문 역할을 한 날부터 3년이 되지 않은 자 등은 KBS 사장 ‘결격사유’라는 점이 법에 명시됐다.

당진시장 예비후보로서 선거 완주를 포기하고 2014년 5월 바로 탈당을 했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이준용 사장은 경과 한도로 설정한 ‘3년’에 미치지 못하는 결격사유를 갖고 있다. 물론 해당 법은 ‘한국방송공사’, 즉 KBS 사장과 이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현행 법령을 위반했다고까지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영방송 테두리에 존재하는 계열사의 사장이, 단지 ‘위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든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법은 ‘최소한 이 정도는 지켜야 처벌을 피해갈 수 있다’는 하한선을 제공할 뿐이다. 법의 헐거운 틈을 자신의 행보를 변명할 무기로 쓰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사실 그동안 KBS 계열사 경영진은 퇴직하거나 퇴직을 앞둔 본사 간부 출신들이 ‘쉬어가는 곳’ 정도로 기능해 왔으나, MB 정권 이후 위상이 달라졌다. 본사 사장으로 ‘점프’할 수 있는 자리로 격상된 탓이다. KBS미디어와 KBS비즈니스 사장을 역임했던 이병순 씨는 2008년 정연주 사장 불법 해임사태 때 사장 자리를 꿰찼고, 조대현 전 KBS미디어 사장, 고대영 전 KBS비즈니스 사장도 ‘사장 영전’에 성공했다. 이런 기록이 계속 갱신되고 있는 것은 ‘후일을 도모하는’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언론계 특유의 ‘관대함’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 감시를 ‘본연의 임무’라고 부르짖으면서도 실상은 딴판이다. 정치권의 달콤한 러브콜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는, ‘권력에 몸이 단’ 이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있다. 심지어 견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곳에 머물다 갈 곳 잃은 사람을 받아주는 ‘안식처’ 역할도 수행한다. 그렇다면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이 언론계를 ‘전용 인력공급처’로 여기는 것이 꼭 틀린 판단일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리 이상한 생각 같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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