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가 이제 중반을 넘어섰다. 그리고 우려했던 일들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제목에서 주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영화도 그렇지만 특히 드라마나 다수의 주인공 체제는 위험성이 매우 크다. 심지어 제목에서 12몽키니, 오션스 12니 하더라도 결국 그들 중에는 리더가 있고, 관객들은 그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관계와 사건의 흐름을 쫓아가게 된다. 드라마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지금의 육룡의 나르샤에는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조선의 건국에 정도전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하더라도, 육룡의 나르샤에서의 이성계에게선 오백년 역사의 고려시대를 끝내고 새 나라를 건국한 어쨌든 위대한 카라스마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모두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정도전 역시 기대했던 만큼의 존재감으로 보답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 건국이라는 엄청난 사건보다는 주변 아니 분이네 가족사에 붙잡혀 전진을 못하고 있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육룡의 나르샤에서 성공한 인물들은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실존인물을 다르게 표현한 가공의 인물들이었다. 길태미가 대표적인 경우다. 고려말 국운이 다한 그때의 세상을 길태미란 인물로 시청자에게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었다. 워낙 인기가 높아 오히려 그가 맡은 고려에 대한 부정적 의미가 다소 희석되지 않았나 의심되지만, 그나마 그의 활약으로 육룡이 날기 전에도 드라마는 시청률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그리고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능력치 부분에서 최고를 보이는 인물로서는 분이를 꼽을 수 있다. 사실 분이는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다. 길태미는 실존인물이라도 유추할 수 있지만 분이는 완전히 작가가 만들어냈다. 그래서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분이가 육룡에 포함되어 있고, 그 역할을 신세경이 연기하기에 자연 주목할 수밖에는 없었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실제로 분이는 초반의 분위기를 다잡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길태미가 가해자의 입장에서 고려말의 분위기를 전달했다면, 분이는 피해자, 피지배자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절실한 개벽의 의지를 시청자 가슴에 세우는 역할을 해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몰래 일군 개간지를 홍인방에게 빼앗기고 이방원에게 했던 대사는 그 톤이나 딕션 그리고 감정까지 완벽해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린 살아야 했고, 살아있으면 뭐라도 해야 되는 거니까”

특히 이 대사는 정말 좋았다. 그러나 이후 분이는 살아있는 것을 증명하는 수준을 넘어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불만들이 쌓이고 있다. 심지어 이방원과의 러브라인마저 거부하는 이도 있다. 이건 좀 의아한 일이다. 그것은 분이가 점점 밉상 캐릭터가 돼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징조다.

육룡 중 분이가 낀 이유는 짐작컨대 결말 부분에 가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여겨진다. 역사가 바뀌어도 민초의 흔적은 없다는 그런 목소리를 기대할 수 있다. 육룡은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이방지, 무휼 등 모두 남자들이다. 거기에 여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분명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넣었고, 넣는 김에 좀 더 눈에 띄게 만들고자 했겠지만 좀 지나친 김이 없지 않다. 사건 전개마저 분이네 가족들 위주로 흐르고 있는 것도 지나치다는 느낌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이방지와 연희의 슬픈 사연 또한 분이네 가족이고, 최근 존재를 드러낸 무명 또한 분이 엄마가 중심에 서있다. 이쯤 되면 너무 가상의 인물에 드라마 전부를 떠맡긴 것은 아닌가 싶을 수 있다. 요즘 사극을 보면서 고증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정말 촌스러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극은 역사에 기반은 둬야 한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가 이성계나 정도전의 특정 시각이 아니라 조선 건국에 개입한 여러 인물들의 시각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민초들의 시각까지 더해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건국 스토리를 보여줄 거라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드라마가 이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분이의 가족사에 육룡이 발목을 잡혀 날지 못하고, 조선 건국은 때가 되면 저절로 될 것만 같은 분위기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그리고 28회 마지막 장면. 이방원이 지략을 써 무명 조직원을 일부러 풀어주어 그 뒤를 쫓고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자를 우연히 분이가 만나게 되고, 조직원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조직에 회의를 품고 분이에게 조직의 중요한 단서를 전해준다. 이건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차라리 분이가 뭔가를 열심히 준비해 그 조직원을 설득했다는 편이 낫지, 그 노력도 들이지 않고 우연히 또 분이에게 결정적 순간을 배당해버렸다. 그저 우연히. 그 뒤에 쫓아온 살수에게 “초무자 무진”이라는 어릴 적 한번 들은 말로 위기를 넘기게 되는 것은 차라리 말을 마는 편이 좋겠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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